※ 베블런효과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사회평론가인 베블런(Thorstein Bunde Veblen)이 1899년 출간한 저서 《유한계급론(有閑階級論)》에서 "상층계급의 두드러진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자각 없이 행해진다"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베블런은 이 책에서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면서 상류층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고,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치를 일삼는다고 꼬집었다.
베블런효과는 상류층 소비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소비 행태로, 가격이 오르는 데도 수요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값비싼 귀금속류나 고가의 가전제품, 고급 자동차 등은 경제상황이 악화되어도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꼭 필요해서 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지 자신의 부를 과시하거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시욕이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고가의 물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의 경우, 값이 오르면 오를수록 수요가 증가하고, 값이 떨어지면 누구나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구매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무조건 남의 소비 성향을 좇아 한다는 뜻에서 소비편승효과라고도 한다.
이런 점에서 다수의 소비자가 구매하는 제품을 꺼리는 소비현상으로, 남들이 구입하기 어려운 값비싼 상품을 보면 오히려 사고 싶어하는 속물근성에서 유래한 속물효과와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대학생들 사이에 명품 소비 열풍이 일면서 일명 명품족으로 불리는 럭셔리제너레이션도 등장하였는데, 2000년대 이후에는 극소수의 상류층 고객만을 상대로 벌이는 마케팅전략인 VVIP마케팅도 등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블런 효과 [veblen effect, ─效果] (두산백과)
베블런은 1857년 7월 30일 위스콘신 주의 매니토웍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노르웨이 이민자였고 베블런은
어릴 때부터 괴팍한 아이였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게으른 아이였고, 집 안 일을 하기보다는 다락방에
틀어박혀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사람들의 별명을 지어내기를 좋아했다. 그가 지어낸 별명은 자주 식구들에 의해 채택이
되었다. 베블런은 17세에 미국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노르웨이어로만 말을 했고 늦은 나이에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그것이 베블런의 글쓰기에 영향을 미쳤다. 뉴딜정책을 입안한 경제학자 스튜어트 체이스Stuart Chase는 그의 문장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문장은 어떤 생소한 와인과 비슷하다. 처음 읽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맛있게
느껴지지도 않고 그래서 이상하다는 느낌을 안겨준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톡쏘는 맛이 강하고 떫고 씁쓸한 맛이 나며 독특하다는생각을 하게된다. 체이스는 베블런의
문장이 어색하다는 것을 완곡하게 지적하고 있다. 베블런의 서투른 문장은 영미권 독자들에 의해 여러 번 지적
된바 있다. 베블런은 1880년 미네소타 주의 노스필드에 있는 칼턴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는 총명한 학생이었고
기존의 사상에 대하여 비판적인 개인주의자 기질을 보였다. 특히 그 대학에서 시행한 노골적인 루터파 신학교육
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베블런은 이 대학을 졸업한 후, 위스콘신주의 메디슨에 있는 모노나 아카데미에서
1년간 수학을 가르친 다음에, 당시 대학원이 막 설립된 존스 홉킨스 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논릭하자이자 철학자인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다음 해 1882년 학교 측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자 예일 대학으로 옮겨 철학을 공부했다.
예일 시절에 배블런 에게 특히 영향을 준 학자는 사회학자 겸 경제학자인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
William Graham Sumner였다. 그는 사회적 다원주의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1884년 박사 학위를 취득한
베블런은 그 후 1891년 7년동안 비참한 낭인 생활을했다. 그는 목사들이 이미 다 자리를 차지한 철학교수
자리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가족의농장으로돌아왔으나 그 땅에 정착하여 농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절에 오로지 독서로만 소일했다. 온갖 분야의 책들을 읽는 와중에서도 틈을 내어 아이슬란드의 민담인
'락스다엘라 전설Laxdaela Saga'를 영어로 번역하고 해설과 주석을 달았다. 이 번역서는 출판사를 찾지 못하다가
그가 유명해진 생애 말년인 1925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1888년 서른한 살 때에 엘런 롤프Ellen Rolfe와 결혼했다.
이 시기, 독서인으로 살던 베블런에게 획기적인 책 한권이 등장했다.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의
유토피아 소설 '뒤를 돌아보기'였는데, 이 책 때문에 그의 학자 생활은 급격한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1887년의시점에서 113년 후인 2000년에 미국이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가 된 모습을
상상한 작품이다. 베블런은 이 책을 읽고 경제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891년 코넬 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하여 경제학자 제임스 L,로플린 James L. Laughlin밑에서 새롭게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아내를 위스콘신에 남겨놓고 혼자 뉴욕으로 공부하러 떠났는데 엘런과 베블런이 여러 차례
겪게 되는 별거의 첫 시작이었다. 베블런은 뛰어난 재능으로 스승 로플린을 감동시켰다.
베블런은 로플린을 따라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갔고, 35세의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대학 교수가 되었다.
미국에서도 명성 높은 시카고 대학 교수단의 일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베블런은 곧 경제학
주제와 관련하여 왕성하게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논문들은 상당수가 당시의 대학 교과 과정에 대해서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1896년부터 1905년까지 시카고 대학의 '정치경제학 저널'의 편집인
을 담당했다. 그는 연구하는 것은 좋아했으나 강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또 강의 중에 아주 기이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 기행은 학생들과 대학 당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그는 학기 초에 자신의 강의를 신청한 학생들에 중간고사나 기말 고사는 치르지 않겠으며
모든 학생에게 C학점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1896년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의 강사가 되었고
1900년에 조교수로 승진했다가 4년뒤에 사직했다. 2년 뒤인 1906년 스탠퍼드 대학의 조교수 자리에
다시 임명되었는데, 7년 전에 발간한 '유한계급론'의 명성이 워낙 높은 덕분이었다. 그는 이 대학에
근무하는 동안에 태평을 내려다보는 산속의 오두막에 살았고 나중에 학계에서 은퇴하여 이 오두막으로
되돌아왔다가 결국 여기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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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니의 책리뷰/인문학] - 경제학 고전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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