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도덕적 명령에는 가언명령과 정언명령이 있다. 가언명령은 조건부 명령이며 동시에 거래이다. 정언명령은 무조건적 명령이며 거래없는 도덕 그 자체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임마누엘 칸트는 1724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칸트는 11명의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는데, 결국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형제자매는 5명이다. 칸트 집안은 수공업자 가족답게 개신교 중에서도 열심히 일하고 금욕하며 근검절약 하는 경건주의를 따랐다. 그 방식이 매우 딱딱했던 모양인지 칸트는 성장기에 몸에 익은 엄숙한 기질을 평생 유지했다. 유난히 공부를 잘했던 칸트는 학자나 법관을 시켜 집안의 격을 높일 기대주였다. 따라서 가업을 물려받거나 다른 장인의 도제로 들어가는 수순에서 제외되었다.
칸트는 ‘에마누엘 Emanuel’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본명이다. 그런데 나중에 히브리어를 공부하면서 자기 이름의 원래 형태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신다는 뜻의 ‘임마누엘 Immanuel’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굳이 이름을 임마누엘로 개명했다. 독일어 에마누엘과 히브리어 임마누엘은 동의어지만 칸트는 개명이 아니라 원형을 복원했다는 데 의미를 뒀다. 이 대목에서 그가 얼마나 심한 원칙주의자인지 알 수 있다.
칸트는 공부만 잘하는 모범생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자라났다. 그의 키는 고작 155센티미터였다. 마르고, 골골대며, 운동 못하고, 얼굴도 못생긴데다가 안색은 창백하고, 등도 조금 굽은 볼품없는 외형이었다. 암기력 좋은 두뇌를 드러내겠다는 듯 이마는 넓었다.
아버지 요한은 말안장을 만들어 번 돈으로 칸트를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 보냈다. 노동 계층 집안에서 목돈을 쓴 셈이다.
칸트는 수학과 철학을 전공하면서 대학을 6년이나 다녔다.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많아서였다. 우수한 학생이었던 만큼 이대로라면 순탄하게 대학교수가 될 것만 같았다. 지방법원의 고문이나 시의원 같은 직책이라도 겸하면 어엿한 하급귀족 가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사가 뜻대로 되던가. 요한은 아들이 22살 때 사망했다. 이 해에 칸트는 대학을 졸업했다. 박사학위는 자력으로 벌어서 취득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배운 게 공부뿐인 칸트는 가정교사로 취직했다. 목사 집안에서 시작해 백작 가문의 가정교사까지, 나름대로 승진을 한 셈이지만 그래봐야 평민 가정교사 신세였다. 그는 귀족 가문의 말 안 듣는 도련님을 상대로 어떡하면 잘 가르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연구했다. 매사에 학문적 완성도를 추구한 그답게 진지하게 접근했고, 완벽주의 탓에 자신은 아이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데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어디까지나 칸트의 관점이다. 실제로 칸트는 쉽게 가르치는 일에 노력한 만큼이나 이 분야의 고수가 되었다.
생업과 공부를 병행하던 칸트는 1755년, 9년 만에 모교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엄청난 암기력과 학구열의 소유자였던 칸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지식을 흡수했다. 그 탓에 그는 철학, 논리학, 수학, 물리학, 윤리학, 법학, 신학, 천문학, 지리, 역사, 화학, 광물학 등을 가르쳤다. 아무리 당시의 교수가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고 해도 이쯤 되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수준이다. 그런데 칸트는 모든 과목의 강의를 지나치게 잘했다.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 입장에서도 보물 상자인 그를 놀리기는 아쉬웠을 것이다. 칸트는 강의도 학문적으로 접근해서 어떻게 하면 가장 쉽게 많은 지식을 전달할지 연구했다.
비유와 유머를 적절히 섞는 기술도 이렇게 개발되었다. 그는 요점 정리의 달인이었다. 어찌나 강의를 잘 했는지 소문이 퍼져 다른 대학 학생들이 칸트의 수업에 원정을 올 정도였다. 심지어 청강생 중에는 외국에서 여행 온 학생도 있었다. 칸트가 가난한 강사 처지를 벗어나 정교수가 되기까지는 무려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강의의 천재이자 대철학자인 칸트, 그는 서러운 비정규직 인생이었다. 왜 오랫동안 빈궁한 생활에 시달렸을까.
교수가 되려면 어느 한 전공 분야에서 특출나다는 평가를 들어야 한다. 칸트의 야심은 철학에 있었지만 그는 아직 철학에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다재다능함과 박학다식은 고용주 측에서야 이리저리 써먹기 좋은 조건이지만 당사자가 교수 임명장을 받기에는 불리하다. 또한 교수는 기본적으로 평생직인지라 자리가 나려면 전임자가 사망하거나 은퇴해야 한다. 칸트가 대학교수직을 갈망하는 오랜 세월 동안 전임자들은 무척 건강했다.
칸트가 지치고도 남았을 때쯤, 드디어 정교수직의 기회가 왔다. 칸트가 하는 강의의 명성은 전국적인 수준을 넘어 국제적이었다. 그의 정규직 취직은 프로이센의 국가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프로이센의 문교부가 취업 알선에 나섰다. 그런데 문교부 장관이 제안한 자리는 할레대학교의 문학부 교수였다. 뜬금없이 웬 문학이란 말인가 ? 정부 관료들은 모든 분야에서 명강의를 구사하는 비결을 칸트의 언어적 재능으로 판단했다. 말솜씨가 아닌 공부의 결과지만 두개골 안쪽은 남의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칸트는 거절했다. 철학에 대한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거절의 대가로 여전히 곤궁한 생활이 남았다. 남은 선택지는 ‘투잡’이었다. 칸트는 강사를 겸하면서 42살에 쾨니히스베르크의 왕립도서관 사서로 취직했다. 도서관 사서는 괜찮은 직업이었지만,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목표인 철학교수직을 얻기 전까지 버티기 위한 선택이었다.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1770년, 드디어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 철학과 정교수 자리가 났다. 칸트는 46세가 되어서야 꿈에 그리던 정규직이 되었다. 저축도 이때부터 가능했다. 그가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때는 14년 후인 나이 60세가 되어서다. 생활은 안정되었지만 강의 지옥은 한층 더 심해졌다. 칸트의 강의는 모두 인기 폭발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학생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과목은 세계지리였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칸트는 평생 쾨니히스베르크 반경 30키로미터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자라고 공부하고 일하고 사망했다. 흡사 도시의 가로수나 시설물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암기력 덕에 외국 도시의 다리를 나사 개수까지 설명할 수 있었다. 칸트는 교단보다는 연구와 집필을 위한 서재에 있기를 원했다. 그의 목표는 가르침이 아닌 철학 자체에 있었다. 교수직은 징검다리일 뿐, 진짜 목적지는 철학자였다. 그러니 강의에 강의가 이어지는 나날에 진력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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