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작가에 의하면 메밀을 구할 수는 없고 근데 냉면은 먹고 싶고 대체 음식으로 만든 것이 밀면이라고 한다.
북한에서 1.4후퇴 때 피난민이 부산으로 많이 내려왔지만 메밀이 없어서 메밀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시민 작가와 유희열은 돼지국밥을 먹으러 갔다. 그러나 국밥 먹다가 갑자기 임마누엘 칸트가 소환되었다.
유시민 : 끌림에 그냥 끌려가서 살면 큐대로 치면 굴러가는 당구공이랑 똑같다고 자기가 욕망의 주인이 아니고 욕망의 종이 된다고,
즉 욕망의 이끌림대로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칸트에 의하면 행복하기 위해 행복해질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행복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두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한다. 첫번째가 정언명령이다.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수 있어야 한대. 예를들어 배고프니까 음식을 훔쳐 먹는건 안된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행동하면 세상은 망할 거니까 '누구나 이렇게 해도 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준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라. 그 두가지를 해야 행복을 누릴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대
유희열 : 저 떡볶이 안먹을게요... 진짜 떡볶이 얘기에 칸트한테 혼나보긴 처음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막...떡볶이 하나 먹자라는 얘길 한 거 뿐이었는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의 공격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한반도 전역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었고
국민들은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향한다. 부산항은 피난민들의 종착지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도 서울을 떠나
부산에 '임시 수도'를 세우기로 한다.
부민동 주택가 골목을 따라 한국전쟁 참전국들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전쟁 중 원래 있던 건물을 활용해서
대통령 관저 건물로 활용했다. 건물은 일본식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살던 집이었다.
조선 총독 군이 관사로 지었지만, 해방되고 나서도 경남 도지사 관사로도 쓰였다. 쓰고 있던 도중에 6.25가
발발하였다. 6.25전쟁의 원인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우발적 충돌 시, 남침 유도성 등 의견이 분분했지만 당시
전황을 담은 소련 쪽 국제 비밀문서들이 해제되면서 김일성이 마오쩌둥과 스탈린과 오랫동안 협의를 거쳐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서 소련에서는 무기 지원을 하고 비밀리에 중국군이 많이 지원을 해주었다.
이때 남한에서도 군내에 병력 이동 정황이 이미 보고되었으나 다 무시하였다.
초기에 전쟁에서 밀리는 원인 중에 주요했던 원인은 북한에는 242대의 T34 탱크 있었다.
T34 탱크는 디자인은 투박하다. 안에 사람이 들어가면 내부 마감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내부 구조이다.
잘못 만든 전차이기 때문에 3~4개월 되면 사용하기 어려운 탱크였다. 전쟁의 전략 자체가 저렴하게 대량생산해서 물량으로 승부를 보는
시스템이었다. 독일은 가장 많이 사용하던 전차 H45를 2차대전 중 총 8천500대 생산하였다. 반면에 소련은 T34 총 8만 대를 생산하였다.
소련의 전차 T34는 투박하지만 경사를 기울여서 납작하게 만들었다.
경사가 가파르면 두께가 실제 두께보다 두꺼워진다. 마지막에 만들어진 T34-85형 경우는 남침에 사용한 전차다. 웬만한 포로는 뚫을 수
없는 장갑차이다. 전차가 내려오자 뚫을 수가 없어서 밑으로 내려가다가 미군과 북한군의 최초 교전은 '오산전투'에서 시작된다. 미군은
보병 대대를 보낸다. 중장비는 나중에 보내도 된다고 자만심을 부리다가 사단장이 포로 잡히는 수모까지 당하자 그제서야 중장비가
필요성을 느끼고 미국의 메인 전차들을 가져오기 시작한다.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할 동안 이승만 대통령은 헬기를 타고 대전->대구->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임진왜란 때 선조와 비슷했다. 국민을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간 행동에서....
서울이 다 점령되기도 전에 한강 다리는 폭파해버리고 거기에 갇힌 사람들은 수백 명이 죽었다.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하기도 전에 일이었다. 90만 명에 달하는 서울 시민 대부분이 서울에 갇혔다.
북한은 낙동강까지 내려왔다가 미군과 UN 군이 북한의 압록강까지 점령하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한 번씩은
휩쓸렸다. 그런데 갑자기 11월에 중공군 60만 명이 참전하였다. 순식간에 다시 서울까지 밀렸다. 문제는 '흥남'에 고립된
연합군이었다. 탈출로가 없어서 해상으로 미군 10만 명과 군수물자 35만 톤을 배로 수송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미군의 배에 무기랑 군수물자 다 버리고 사람만 가득 태웠다. 그때 총 배에 오른 피난민은 1만 4천 명이다.
배들은 이틀을 항해하여 부산과 거제도로 내려왔다. 항 겸 돈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많아졌다.
1949년 말, 부산 인구가 47만 명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1955년, 부산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남북 인구 합쳐서 2000만 명이 넘었는데 200만 명이 사망하였다. 인구 1/10 이상이 죽은 참사였다.
부산은 폭격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초량동 언덕에 위치한 장기려 기념관에는 장기려 박사의 생애와 업적,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시민 작가에 따르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거의 성자에 가까운 삶을 살아오신 분이라고 했다.
장기려 박사는 일제시대 때 경성의전에 입학했다고 한다. 입학은 31등으로 입학했지만 졸업은 수석으로 하였다.
29~39세 때 평양에서 의사, 대학교수 등으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당시 월남하였다. 그 후 부산에 정착해서
병원을 세우고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봤다. 천막에서 시작한 병원 큰 병원이 되었고, 규모가 커짐에 따라
유지비가 많이 필요하게 되어서 병원비를 받아야 하는데 돈이 없는 환자들에게 돈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환자의 진료비를 자신의 급여로 내준 경우도 많고 어떤 환자에게는 생닭 2마리 값이
적힌 처방전을 내려준 적도 있다고 한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 병원이 없는 무의촌 등으로 의료 봉사도 다녔다고 한다. 거제 대로 매주 4년간이나 진료활동을
다녔다. 1968년, 건강보험 제도가 있기 10년 전에 최초의 민간인 의료보험을 만들었다고 한다. 국가 의료보험을 만들 때
청십자의료보험을 참고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장기려 박사는 최초로 간절제 수술도 성공했다고 한다.
평생 지냈던 곳이 조그마한 옥탑에서 지냈고, 돌아가실 때 남긴 재산의 거의 없었다고 한다.
남긴 재산은 천만 원이 들어 있는 통장 하나, 이마저도 간병인에게 주었다고 한다.
"늙어서 별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다소 기쁨이긴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이산가족 상봉도 정부에서 추첨으로 뽑는데 내가 가게 되면 누군가 나로 인해 못 가지 않느냐며 3번이나 거절하였다.
그 이후 장기려 박사가 세상을 떠나고 5년 뒤 49년 만의 아들과 김봉수 여사는 만나게 되었다.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빨리 멀어진다는 허블 법칙을 발견하였다. 허블 우주 망원경으로도 유명하다.
르메르트 과학자는 벨기에의 신부 출신이고 허블보다 2년 먼저 우주가 팽창한다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허블은 굉장히 정치적인 사람이다. 허블의 논문에는 우주가 팽창한다는 가장 중요한 데이터, 증거가 있는데,
우주가 팽창한다는 이론은 르메르트가 먼저 발표하였다. 증거를 찾는 방법도 르메르트가 먼저 발견하였다.
허블이 르메르 토의 공로도 언급하지 않아서 허블 법칙으로 표기되었다가 2018년 10월 29일 국제 천문학 연합(IAU)
에서 공식적으로 <허블.르메르트 법칙>으로 표기를 권장하였다.
김상욱 교수는 그 사람을 평가하고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후대의 몫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장기려 박사가 남긴 명언으로 마무리되었다.
나의 세계는 나의 사랑하는 곳에 있다. 그것은 나의 영원한 왕국이다.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말라.
우리는 자진해서 사랑하자 그러면 사랑을 받는 자 보다 더 나은 환희로 충만하게 되리라.
-장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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