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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인문학

자유와 평등으로 치른 인류의 성인식 프랑스혁명

by 워니의서재 2019. 1. 9.


혁명가 생쥐스트(Louis A.L.de Saint-Just, 1767~1794)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자유는 폭풍우처럼 몰아쳐서 천둥처럼 승리할 것이다.


전체 유럽인구의 5분의 1일 모여있던 18세기 프랑사는 당장이라도 빅뱅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였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당시는 서유럽의 경제성장이 두드러졌던 때다.

영국과 프랑스는 국민소득이 두 배 이상 늘었고, 공업 생산과 시장 규모도 크게 확대

되었다.



부를 쌓은 상인과 법률가 등 평민 부르주아(Bourgeois) 역시 많이 늘어나 있었다.

그 당시 인구의 2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귀족과 성직자가 전체 토지의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80퍼센트에 이르는 농민은 각종 부역과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구 통계학적으로 20~30대의 젊은 층이 많은 나라일수록 혁명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

프랑스는 전체 인구 가운데 20~40대가 40퍼센트나 됐고, 20대 미만도 36퍼센트에 이르렀다.

경제 성장이 높아진 프랑스는 평민의 자존심, 신분에 근거한 불합리한 착취 구조, 혈기 넘치는

인구 구성이라는 혁명의 3박자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영국은 명예혁명으로 국민듸 대표가 의회 권력을 장악하고 국왕의 지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1776년의 미국 독립 선언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저항 정신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 여건이 뒷받치해 준다 해도 철학이 없다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철학은 폭동과 혁명을 구분시켜 주는 중요한 기준이다. 이념 없이 폭발한 시위와 반발은

그 순간이 지떻게 바꿔야 할지에 대한 로드 맵을 제시해준다.



18세기 프랑스를 변혁시킨 철학은 로크(John Locke,1632~1704)의 철학을 꼽는다. 

그러나 당시 권력자들은 통치의 근거를 이른바 ‘왕권신수설’에서 찾았다.

왕권신수설의 대표주자 필머(R.Filmer, 1588~1653)에 의하면


하느님은 왕이 될 권리를 오직 한 사람에게 부여했다. 아담은 전 인류의 아버지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왕은  이 아담의 상속자들이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복종하듯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 왕에 대한 불복종은 신을 공경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경은 유럽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크는 여기에 사회계약설로 맞섰다. 로크에 의하면 왕이 될 권리는 신에게

비롯 된 것이 아니며, 국왕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국왕도

정부도 없었던 자연상태를 가정하여 권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사람은 자신들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통치자를 세우기로 계약을 맺었다.

마침 동네 주민들이 합의 아래 자치회를 구성하듯 국왕을 세웠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통치자가 사람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권력을 이용하여 착취하고 괴롭히는

권력자는 폭력을 써서라도 몰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혁명을 일으켜서라도 국민의 뜻을

살릴 수 있는 통치자로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 왕정은 수많은 전쟁과 낭비벽으로 극심한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 많은 세금이 필요한데 백성들이 돈을 내놓지 않자, 루이 16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삼부회는 제1신분, 제2신분 귀족 대다수의 평민으로 이루어진

제3신분이 모여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는 국민 대토론회였다.


삼부회에서는 제1신분과 제2신분이 힘을 합쳐 제3신분을 억누르고 구슬려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던 것이 관례였다. 세력이 커진 제3신분은 더 이상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다. 이들은 더 많은 투표권을 요구하다가 받아들여

지지 않자, 마침내 1789년 5월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국민 의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국왕이 회의 장소를 폐쇄해 버리자 근처 테니스 코트로 가서 "프랑스를 위한 헌법을

제정하기 전에는 절대로 해산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 이른바 '테니스 코트의 서약'

이다. 프랑스 혁명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뒤이어 1789년 7월14일 치솟는 빵값에 분노한 민중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다.

국민 의회는 1789년 8월에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라는 인권 선언을 발표했다.

제1조에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2조 "모든 주권의 원천은 국민에게 있다." 라는 말을 보고 민중들은 흥분하지

않을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등 여러국가들도 자신들의

백성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나머지 전쟁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자 모든 불평등과 정치적 차별의 철폐를 외치던 자코뱅당

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들은 혁명을 명분으로 끔찍한 공포 정치를 단행했다.

수천 명의 귀족들이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목이 잘려나갔고, 1793년 루이16세

마저 단두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혁명 중에 목슴을 잃은 사람은 무려 10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왕당파가 반란을

일으킨 방데 지역에서는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는 참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혁명의 적으로 몰린 이들을 빨리 살해하기 위해 죄수들의 손발을 묶어 배에

태운뒤 가라앉히는 잔인한 처형이 일어났다. 대다수 희생자는 혁명과 상관없는

순박한 농민들이었다.


혁명의 잔인함과 피로감은 과거 질서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프랑스는

루이16세의 동생 루이18세가 다스리는 왕정 체제로 되돌아갔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
국내도서
저자 : 안광복
출판 : 어크로스 2017.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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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이후 영화 레미제라블 http://wonysworld.tistory.com/247

레미제라블 민중의 노래 http://wonysworld.tistory.com/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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