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형 '집단 무의식'
원형은 모든 개인의 경험을 초월하며 어떤 개인의 경험보다 앞서 존재하는 초인격적 본질입니다. 집단 무의식은 원형이라는 충실한 기억으로 만들어집니다. 옛날에 살았던 조상들이 경험한 집단적 기억이나 이미지들이 원형으로 보존되어 집단 무의식으로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각 개인에게 투과됨으로써 개인의 무의식이 형성됩니다.
집단 무의식 구조안에는 인간 심리의 원형적 건축자재들이 저장되어 있음, 인류 전체에 관한 집합적 기억들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각기 다른 문화와 시대에 있었던 상징물, 이미지, 신화, 신 등이 놀랍도록 비슷할뿐더러 환자의 꿈에 나타난 이미지들과도 비슷하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합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원형이라는 벽돌로 지어진 집단 무의식이라는 집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집단 무의식에서의 집단은 일상적인 어느 집단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오랜 역사를 지닌 인륜 전체를 가리키는 개인이며, 일시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개별 인간과 인류 전체가 생존하는 한 영구히 지속됩니다.
◈ 원형 '반드시 마주쳐야 할 그림자'
억압하고 억제했던 모든 것들, 무의식은 본능과 직관의 어두운 샘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융은 우리가 어둠 속에 들어가 그 어둠의 내면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해내야 한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빛의 종교가 되고자 우리로 하여금 어둠으로부터 멀찌감치 돌아서도록 격려했습니다. 융에 따르면 이것은 몸과 마음에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해도 지적하지 않고, 부모가 보고 싶은 선한 행동만 칭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지적받지 않은 아이는 잘못된 행동을 모를 것이고 계속해서 잘못된 행동을 반복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융도 어두운 면을 마주하고 인정해야 선도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 있어야 삶이 있고 슬픔이 있어야 행복이 있듯이 악이 있어야 선도 있습니다.
융은 어두운 측면을 그림자라고 언급했으며, 그는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 민족, 공동체 그리고 집단들도 반드시 마주쳐야 할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빛을 향해 노력하면 할수록 던져진 그림자는 더욱 길고 어두워집니다. 그림자는 삶의 바람직하지 못한 요소들뿐만 아니라 '순진한 정당성'이 결코 일깨울 수 없었던 본능과 직관의 '어두운 샘물'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강남에 있는 구룡마을 판자촌과 목포 신도시가 생각납니다. '판자촌'이나 '목포 주택' 주변에 높고 화려한 건물들이 들어서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경관을 얻게 되지만, 낮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그림자가 생겨 더욱 어두워지게 됩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 판자촌이나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게흘러서 가난한 한심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거기서 사는 사람들 중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내 자식이 거기 사는 아이와 어울려도 괜찮은지? 또는 자기가 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지? 물론 예외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선과 악은 고정되었지 않습니다. 또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사회에 의해 조건화된 것들입니다. 의식적인 가치 기준에서 '선'으로 불린 것이 있다면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악'이라고 표현합니다. 심리적인 경험 속에서 선과 악은 역전될 수도 있습니다.
나치에게 희생당한 유대인은 피해자이고 선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요즘 팔레스타인 지구에 유대인이 하는 행동들을 봐도 유대인이 선으로 보일까요? 가장 흔한 예로는 도시락 폭탄으로 유명한 윤봉길은 우리에게 독립운동에 힘써준 영웅이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그저 대량학살을 자행한 테러리스트였을 뿐이었지요.
영화 '사바하'가 이 부분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사바하 영화를 볼 때 '융'과 관련된 책을 보기 전에 봐서 종교적인 측면밖에 못 봤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융의 이론과 상당히 일치하더라고요.
선과 악 사이에서 고통을 받는 도덕적인 갈등은 개인의 본성 속에 악마와 천사를 모두 들여와 제3의 입장을 만들어서 객관적으로 보게 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고 합니다.
◈ 융의 세 번째 자아
융이 제삼자라고 불렀던 세 번째 자아는 차단물이 제거되어 삶이 지속될 수 있는 형태의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낡은 자아를 괴롭히고 몰아세웠던 절대적인 요소들을 통합할 만큼 충분히 크고 도덕적으로 성숙한 새로운 자기가 현존재 안으로 들어옵니다. 위기나 긴박한 상황에서 우리를 끌어내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지혜나 통찰이 유일합니다. 이것은 정체감 그리고 내적 현실감과 실체감을 부여합니다.
개인은 내면의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페르소나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융은 흔히 우리들이 사회적 페르소나에 집착하던 행동으로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영혼과의 연결이 찾아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상이라는 것은 성공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이상적인 목표라고 말했습니다.
융의 책들은 말이 어렵게 쓰여있는데, 제가 이해한 바로는 페르소나와 그림자가 마주하고 서로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새로운 제3의 자아가 탄생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악'이 없기에 내가 악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페르소나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나의 역할이고, 그림자는 악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악이 아닌 억압된 내 욕망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림자와 페르소나가 갈등을 겪고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찾게 되면 이것이 곧 제3의 자아가 탄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예를 들자면 그림자가 생각한 꿈은 예술가였는데, 부모나 주변의 시선으로 할 수 없이 의대에 진학합니다. 대학생활 도중 그림자와 갈등을 겪게 되고 다시 예술가의 꿈을 향해 노력하는 자아가 융이 말하는 제3의 자아가 아닐까 합니다. 부모나 지인들이 생각할 때 내가 예술가가 되는 것을 극도로 반대하니까 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악이 아니고 내 욕망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융은 사회적 규범과 고정관념에 적응한다는 것은 영혼을 돌보는 데 있어서 치명적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영적인 의미는 우리 서로에게 관계를 맺어줍니다. 낯선 이들의 사회는 오직 공유된 의미와 가치의 창조를 통해서만 공동체가 됩니다. 이것 없이 우리는 고립되고 외로우며, 단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융이 말했던 인상 깊었던 구절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별들은 하늘로부터 추락했고, 우리가 지닌 최고의 상징은 핏기를 잃었으며, 비밀스러운 삶은 무의식은 우리를 지배한다. '마음의 중심' 깊은 곳은 격정으로 타오르고, 비밀스러운 불안은 우리 존재의 뿌리를 갉아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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