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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인문학

에리히프롬의 생애

by 워니의서재 2018. 11. 6.

에리히프롬(Erich Fromm)은 1900년 3월 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정통파 유대교도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8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했는데, 1919년 여름 학기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기면서 전공을 사회학으로 바꾸어

알프레트 베버(저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베버의 동생),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와 하인리히

리케르트 밑에서 배웠다. 프롬은 1922년 하일델 베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0년대 중반에는 프리다 라이히만의 정신분석치료소에서 정신분석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았다. 1930년에는 베를린에서 자신의 진료소를 개업했다. 프롬과 리리히만은 1926년에

결혼했는데, 라이히만은 프롬보다 11세 연상으로, 어머니처럼 프롬을 대했고, 프롬은 그녀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1930년에 별거로 끝나고 말았다.


정식 이혼은 그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고 1940년에 이루어졌지만, 그 뒤로도 두 사람은 평생

우정을 유지했다. 1930년에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들어갔으나, 이 연구소는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뒤 1933년 '국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폐쇄당했다. 프롬은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제네바로 이주했다가 1933년 시카고 정신분석연구소의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망명했으며, 이듬해에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 사회연구소가 부설되자 뉴욕으로 옮겼다.



당시 프롬이 교류한 정신분석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카렌 호나이였다. 프롬은 베를린에서

정신분석을 연구할 무렵부터 그녀와 알고 지냈는데, 1932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호나이는 시카고에

살다가 1934년 프롬이 뉴욕으로 이주하자 그를 따라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프롬보다 호나이가 15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했으며, 서로에게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호나이는 프롬에게 사회학을 배웠고, 프롬은 호나이에게서 정신분석을 배웠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1930년대 말에 끝났다. 이 무렵부터 프롬은 독일어 대신 영어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의

영어는 직접적이고 격조 높은 것이어서 그의 독일어 스타일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프롬은 1938년 컬럼비아 대학에 사표를 낸 뒤 1943년에 워싱턴 정신병리학교의 뉴욕 분교 설립에

이바지했고, 1946년에는 정신병릭학 과 정신분석학 및 심리학을 연구하는 윌리엄 앨런슨 화이트

연구소 설립에 참여했다. 1941년부터 1949년까지 베닝턴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 후 멕시코시티로

이주해 멕시코 국립자치대학(USAM)의 교수가 되었고, 이 대학 의학부에 정신분석과를 개설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미시건 주립대학에서 심리학 교수로 가르쳤고, 1962년 이후에는 뉴욕 대학의

예술과학대학원에서 객원교수로 가르쳤다. 1965년에 은퇴할 때까지는 USAM에서 가르쳤고, 그 후

멕시코 정신분석연구소에 재직하다가 1974년 스위스의 무랄토로 이주했다. 1980년 여든 번째

생일을 닷새 앞두고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국내도서
저자 : 에리히 프롬(Erich Fromm) / 김석희역
출판 : 휴머니스트 201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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