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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인문학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의 생애

by 워니의서재 2018. 10. 12.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피렌체 시내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피렌체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르네상스시대의 피렌체는 금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청과 결탁하여 유럽 전역에 걸쳐 금융업을 하고 있었다. 

교황청의 재정을 담당하는 일이 가장 많은 부를 쌓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을 지원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이탈리아 내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1492년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가 사망했을 무렵에 

메디치 가문에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프랑스왕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입했다.

프랑스왕의 요구에 굴복하여 순순히 프랑스군을 피렌체를 통과시켜 주었다. 

이에 피렌체인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마침내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였고 

그들을 선동했던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의 정권을 잡게 되었다.


격한 수도사였던 사보나롤라는 시민들의 사생활을 


억압하고 도시를 종교적인 분위기로 몰아갔다. 


대외적으로 피렌체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것 때문에 교황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미움을 받아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사보나롤라에 대한 


반감도 높아져 마침내 1498년 그는 실각하였고 화형에 처해졌다.

사보나롤라가 죽은 지 겨우 닷새 후 새 정부는 29세의 젊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 서기장으로 선출하였다. 


그와 함께 서기장 후보로 나선 인물 가운데는 교수와 변호사 등 


어느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당시 무직이었던 


마키아벨리가 이들을 제치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의 청년기 시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의 


경력이라든지 선출 배경에 대해서는 좀처럼 알기 쉽지 않다. 


1498년 6월 19일 마키아벨리는 제2서기국의 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이후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독일 등 외국과 이탈리아의 여러 나라의 사절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강대국으로 파견될 경우에 주로 상대방의 요구 조건을 완화하거나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사절 경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체사레 보르자에게 파견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교황 알렉산드로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과 프랑스왕 루이 12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탈리아 중부를 정복해 나가고 있었다.



이탈리아 중부 로마냐 지방은 본디 교황령에 속했지만 

이 무렵에는 사실상 여러 나라로 독립한 상태였다. 

체사레 보르자는 비상한 계략과 뛰어난 전술을 통해 

빠른 시간 내에 로마냐 지방을 점령해 나갔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피렌체는 마키아벨리를 그에게 파견하여 

그의 의중을 파악하게 하였다. 

발렌티노 공작으로 불린 체사레 보르자는 마키아벨리가 

여태까지 본 군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였다. 


그는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것은 바로 마키아벨리가 꿈꾸고 있던 것이었다.


군주론은 바로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쓴 것이다.

1505년에도 에르 콜레 벤티볼리오가 지휘하는

피렌체 용병 군이 다시 피사를 포위했으나 

비텔린 때와 같이 성벽을 부수고 난후 전투를 포기하였다.

이러한 실패들은 피렌체로써는 굴욕적이었고 

이탈리아 군대의 허약함을 그대로 내보이는 꼴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키아벨리는 

후에 군주론에서 용병과 원군에 의지하지 말고 

자국의 국민으로 이루어진 국민군을 양성할 것을 주장하게 된다.



1513년 2월 피렌체의 지배자 줄리아노 데 메디치 암살 계획이 발각되고 

음모자 중 한 명이 가진 서류에 마키아벨리의 이름이 올라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이 음모와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메디치가의 재집권으로 오랫동안 근무하던 사무국에서 쫓겨나고 

고문과 투옥까지 당했지만 공직에 복귀하고자 하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이전의 공화정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지금의 메디치 정권에서도 

그는 자신이 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인 친구 


프란체스코 바토리를 통해 복직을 시도하였다. 

지난 14년간 바쁘게 돌아다녔던 습관에다 일에 대한 

열정 때문에 지금 여유는 고통스럽기만 

열정 때문에 지금 여유는 고통스럽기만 했다.


비록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마키아벨리는 이 시기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해 후반부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사 논고, 군주론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집필을 시작한 것은 로마사 논고였지만 당시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던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하기 위해 잠깐 작업을 멈추고 군주론을 몇 달에 걸쳐 완성했다. 

이 책은 교훈이 될 만한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고 군주로서 지녀야 할 자질을 논하여 

메디치가에 바침으로써 공직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의 소망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로렌초 데 메디치는 군주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참조] 마키아벨리 평전 

로베르토 리톨리 (지은이), 곽차섭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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