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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인문학

철학자 데카르트 생애

by 워니의서재 2018.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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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프랑스 투렌 지방의 

작은 마을 라 에유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1년 2개월 만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데카르트도 이미 결핵을 앓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아버지에게 귀한 아들이었다.

시의회 의원이자 법률가로서 사회적 지위는 

물론 벌이도 좋았던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근처의 의사들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진단뿐이었다.

다행히 데카르트는 외할머니와 유모의 헌신적인 간병으로

간신히 살아났다.



감격한 아버지는 다시 태어났다는 뜻의 레나투스를

프랑스식으로 바꾼 르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약하게 태어나 죽을 고비까지 넘긴 데카르트의 건강은

매우 안 좋았다.

유년시절 데카르트는 걸핏하면 침대에 누워 있었고 잠도 많았다.

외할머니, 유모, 하녀 들은 데카르트를 보살폈다.

걷기도 힘든 데카르트는 남자아이들과 뛰어놀 수도 없었다.

동네에는 '프랑수아즈'라는 또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데카르트가 10살이 될 때까지 소꿉친구였다.

첫 우정이자 첫사랑이었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혼자 있을 때는 

.사팔뜨기 인형을 가지고 놀 정도였다.

'프랑수아즈'는 사시였다. 



데카르트는 평생 여성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졌다.

또한 프랑수아즈 덕에 사시인 사람들에게도 호감이 있었다.

훗날 데카르트는 하녀들에게 관대하고 친절한 고용주가 되었다.

많은 시간을 누워서 보낸 데카르트는 머릿속에서

자신을 제외한 인간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허점을 짚어내는 생각을 계속하였다.


아버지는 법학자다. 법은 현실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암기하고 적용하는 방법론이다.

아버지는 법을 집행할 뿐 법의 근본이 되는

정의가 무엇인지 고찰하지는 않았다.

항상 사물과 사람을 의심하고 관찰하는 데카르트를 보고

아버지는 '꼬마 철학자'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결코 칭찬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식들 중 데카르트를 가장 껄끄러워했다.

형제들도 데카르트를 불편해했다.

종일 어른들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아이가 

마냥 귀여울 리는 없다.

데카르트는 10살이 되자 예수회 계열의 기숙학교

라플레슈에 진학했다.



라플레슈는 중세 신학을 기반으로 한 스콜라 철학의 명문이었다.

스콜라 철학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신앙이 최고의 가치라는 결론을

정해두고 그에 걸맞은 논리력을 끼워 맞추는학문이다.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도구로 사용했다.

라플레슈의 논리 기술은 데카르트가 훗날 자신의 철학을

전개할 때 큰 도움을 주었다.


데카르트는 라플레슈에서 혼자 수학에 몰두기도 했다.


인간의 가르침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착각하고 실수하고 성급한 믿음에 빠지는

주관적인 존재다.

내가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일 앎은 누구보다

먼저 나 자신을 납득시켜야 한다.

신중한 데카르트는 투쟁보다 

기다림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라플레슈의 기숙사에서 8년을 마음껏

누워 지내다가 졸업했다.

졸업 이후 이번에는 파리에 있는

푸아티대학교에 진학했다.

전공은 법률이었다.

법조인 집안아 있었기에 공부 잘하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주길 바랐다.



데카르트는 1616년, 푸아티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법조인이 되지 않고

집에서 수학과 철학 공부에만 몰두했다.


철학과 수학 연구는 생각이고 생각은 누워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는 사람은 알 수 없다.

그저 빈둥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런 자식에게 부모는 흔히 '밖에 나가 놀기라도 해라'라고 말한다.

데카르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견문을 넓히라는 명목으로 두둑한 용돈과 하인까지 딸려

아들을 다시 한번 파리에 보냈다.



데카르트는 아버지의 돈으로 그럴듯한 말을 타고 파리 시내를 누볐다.

파리 사교계에서 춤꾼이 되었고 틈만 나면도박을 즐겼다.

도박하는 동안에도 수학적 확률 연구도 동반했다.

데카르트는 당대 최고의 무술가이자 현대 펜싱의 형태를 만든

 사람 중 하나인 샤를 베자르에게 직접 검술 지도를 받았다.

데카르트는 펜싱 실력도 상당했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궁정과 군대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귀족이 아닌 데다 평민 청년을 불러줄 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군대에 자원해서 들어갔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이 시대에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군대보다 적합한 곳은 없었다.

26살의 데카르트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담판을 지었다.

자신은 법조인을 살 생각이 없으며, 앞으로 홀로

학문 연구에만 매진하다 죽겠다고 선언했다.

1637년 라틴어가 통용되던 당대의 학계에서 

파격적으로 프랑스어로 된 책이 발표되었다.



그는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야 진정한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1649년 9월, 데카르트는 스웨덴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를 철학의 너무 심취한 나머지

새벽 5시부터 그의 강의를 듣기 원했다.


늦잠을 자던 데카르트는 일찍 일어나는 일이 곤욕이었다.

그는 일주일에 3번 새벽 4시 30분에 마차를 타고

5시부터 여왕을 가리켰다.

그 생활을 오래 지속한 나머지 급성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1650년 2월 데카르트는 53세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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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저]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저자 홍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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