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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리뷰

해외다큐멘터리 부의탄생 철강왕 카네기1

by 워니의서재 2018. 10. 28.


    


앤드류 카네기의 스승 스캇은 비 오는 날 필라델피아에 묻었다. 스승을 잃은 카네기는 상실에 빠졌다. 

카네기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가정환경 때문에 12세 때부터 카네기는 피츠버그 지역 철도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사장 팀 스캇을 만난다. 24세에 카네기는 회사 지배인까지 승진한다. 스캇과 

협업하여 철도의 서부까지 확장했다. 스캇은 미국 최대의 교량을 건설하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카네기가 

건설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미시시피강을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려고 했다. 당시에는 교량의 4분의 1일

무너졌으며, 또 그렇게 긴 교량을 건설한 적이 없다.



그러나 카네기는 위험 감수 없이 성과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전부를 다리에 투자했다. 카네기는 기술자에게 도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술자는 이 교량은 미시시피 유량을 못 견딘다고 말한다. 통행인, 기차 하중, 강물의 합력이 철의 전달 강도를 초과하여 다리가 붕괴된다고 했다. 그러나 카네기는 불가능한 건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든 만들어보자고 카네기가 계속해서 부탁하자 기술자가 말했다. 강철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카네기는 제련소로 향한다. 강철은 철과 탄소를 혼합해 1100도 이상에서 제조된다. 문제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하고 가격도 굉장히 비싸다.



이 당시 강철은 너무 귀해서 보통 포크, 나이프, 검을 제작하는데 쓰였다. 그 누구도 강철로 대규모 구조물을 제작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었다. 교량을 완성하려면 막대한 양의 강철을 이용해서 길을 만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카네기는 제강소의 화학자를 찾아가 강철이 어떻게 제조되는지 조언을 구했다. 영국의 과학자 헨리 베써머가 제조 시간을 단축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강철 레일 하나 당 제조되는 시간을 2주에서 15분으로 단축했다. 카네기는 신기술의 가치를 알아봤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사업에 적용했다.


33세의 카네기는 불가능을 실현할 준비가 되었다. 미시시피강을 가로질러 미국을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 중이었다. 
그러나 카네기의 강철 사용은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건설기간이 예정보다 2년이나 더 걸렸다. 비용은 계속해서 늘어갔다. 심각한 예산초과에 건설 중단 위기까지 갔다. 절박한 카네기는 투자자들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카네기의 절실한 설득은 투자자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였다. 마침내 4년 후 교량은 완공되었다. 그러나 카네기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왜냐하면 이런 다리는 어디서도 본직이 없는 다리였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카네기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당시 미신은 코끼리가 불안정한 구조물 위를 건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교량 개통하던 날 카네기는 다리 건너는 쇼를 개최한다. 선두에는 코끼리가 선다. 코끼리가 먼저 가면 사람들은 따라 건널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인 트루스 주민들은 직접 다리에서 어떠한 하중에도 견디는 걸 봤다. 다리 건너는 쇼가 끝나고 강철 수요는 카네기가 다리 건설을 위해 생산한 생산량보다 더 많이 생산되었다. 가장 큰 고객은 그도 잘 아는 철도였다. 기존 철도 교량을 철제교량으로 교체하였다.



자금이 더 필요하게 된 카네기는 오랜 스승인 팀 스캇에게 부탁했다. 그의 도움으로 현재가치의 2100만 달러
(한화 약:239억)를 확보했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 강철공장을 짓는다. 카네기는 피츠버그 외곽에 12만 평 부지 위에
제철소를 지었다. 당시 미국 최대 규모였다. 하루 동안 225톤의 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도는 과잉 건설로 이익 유지도 쉽지 않았다. 성장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 미국 경제의 중추, 철도산업이 붕괴되었다. 미국은 최악의 경기 침체에 놓이게 된다. 카네기는 위기에 빠졌다. 철도가 없으면 강철의 고객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카네기는 다른 대안을 생각해냈다. 철도 말고 구조용 강철을 이용해서 건물을 짓는다. 세계 최초 
마천루가 시카고에 지어졌다.


몇 년 후 시카고에만 10만 채가 넘는 새 빌딩이 세워진다. 미국은 카네기의 강철을 등에 업고 고속성장을 한다. 석유왕 

록펠러의 재산은 카네기의 재산의 7배였다. 카네기가 록 페러를 넘어서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헨리 프릭은
30세에 자수성가한 백만장자다. 중서부 1위의 석탄 공급자다. 프릭은 원하는 것을 위해 어떠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카네기와 헨리 프릭은 동업자가 되었다. 첫 과제는 카네기의 재조정이었다. 프릭은 철강의 비용 절감과 낭비를 줄이면 이익이 증가한다고 생각했다. 카네기 제철소는 생산량 증가로 불과 2년 만에 이익률이 2배 향상되었다. 
그 이익으로 오하오,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경쟁사들도 인수하였다. 프릭은 으름장과 협박으로 공급자와 카네기 제철소
의 유리한 계약조건으로 다시 계약한다. 불필요한 비용을 제거하고 생산량을 늘려나간다. 카네기는 핸리 프릭을 
회장 자리에 임명한다.



프릭은 피츠버그 동쪽 언덕땅을 매입했다. 거기에 회원제 클럽을 만들어 전국에 부자들을 가입시켰다. ‘사우스 포크 낚시 수렵 클럽’은 거대한 인공호수 위에 자리 잡고 회원들은 뱃놀이와 낚시를 했다. 카네기도 클럽의 회원이었다. 클럽의 놀이를 위해 사우스 포크 댐을 통제하여 2천만 톤의 물을 담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이었다. 댐 22km 아래 존스타운 마을에 철강 노동자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댐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폭우가 내리면 댐의 물은 범람할 수도 있다. 마을 관계자는 댐의 강화를 부탁했다. 그러나 프릭은 무시하고 말았다. 프릭은 클럽에 가는 길에 마차가 지나가기 위해 댐을 낮추고 마차 길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댐은 더욱 더욱더 부실하게 되었다.


1889년 펜실베니아 주 존스타운에 불길한 구름이 몰려오고 폭우가 내리기 시작한다. 사우스 포크 호수의 수위가 상승 중이다. 사우스 포크 댐이 붕괴할 것 같으니 대피하라고 주민들에게 전보를 쳤다. 그러나 존스타운 전신 사무소는 이러한 여러 번 보냈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틀린 정보라고 생각하여 무시하고 대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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