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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철학심리학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 저자 안광복

by 워니의서재 2019. 4. 22.

 

 

나는 도대체 왜 살고 있나?

우리는 살면서 내가 믿어왔던 어떤 것과 다른 질문을 듣게 되면 상당히 불편합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할 질문 22가지를 추려내 담았습니다. 독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질문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과 마주할 때 우리는 한 단계 성장한다고 합니다.

 

첫 질문은 내가 왜 살고 있죠? 학교는 꼭 다녀야 하나요? 이렇게 직장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런 질문들로 시작합니다. 보통 행복하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이런 것을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같은 물음은 삶이 꼬이고 뜻대로 되지 않는 시기에 튀어나옵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사람들은 내일모레가 시험인데 왜 사는지 따위를 뭐하러 생각하는 거야? 또는 직장을 왜 나가냐고? 다음 달 카드 값, 공과금 막을 자신 있나 봐?라는 대답으로 질문을 억누릅니다.

 

 

그런데 삶의 핵심을 이루는 질문들은 삶이 틀어지고 병들었을 때 마주하게 되고, 때는 이미 늦어 인생을 바로 세우기는 많이 어려워집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하듯 마찬가지로 나의 일상이 튼실하고 견고할 때 인생의 의미를 묻고, 일과 생활의 목표와 가치를 점검해야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 사는지 자기 인생이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 평소에도 깊이 묻고 탐구하는 사람은 어떤 위기가 닥쳐도 잘 견뎌냅니다.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 Richard Easterline'은 부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가진 것이 많아져도 더 이상 행복도가 증가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연평균 소득 1억 8000만 원이 넘었을 때부터 그렇다고 합니다. 사회복지가 더 잘 갖추어진 사회에서는 연봉 6000만 원 정도가 되면 돈이 더 이상 행복감을 늘려주지 못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심리학자 매슬로 Abraham H. Maslow에 따르면 인생을 꾸려가는 힘은 결핍 욕구와 존재 욕구 두 가지라고 합니다. 결핍 욕구에 이끌리는 삶은 식욕과 수면욕, 안전함과 소속감 등을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갑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인의 조건으로 여가를 꼽았습니다. 삶의 여유가 돌고 시간이 생기면 취미생활도 하고 삶을 고상하게 가꿀 인문학이나 예체능 활동 등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존재 욕구는 절로 피어나지 않습니다. 욕망도 훈련해야 좋아집니다. 훌륭한 욕망을 보고 배우지 않은 사람은 평생 결핍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충분히 먹고살만하면서도 결핍 욕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비교'에 발목 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처지를 바닥으로 끌어내립니다. 이들은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끝내 만족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많은 것을 갖고 성과를 많이 내면 행복해집니다. 반면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내려놓는 것 또한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어느 쪽이 행복에 이르는 더 쉬운 길일까요? 그리스의 변두리 미케네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대왕'은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만난 일화는 굉장히 유명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디오게네스에게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그대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가?" 디오게네스는 "자네가 햇볕을 가리고 있으니, 옆으로 좀 비켜주시게." 이 말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신하들과 돌아서며 말했습니다.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물과 햇볕만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알렉사드로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이집트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도 만족하지 못해서 인도까지 정복하려던 왕이었습니다. 과연 그가 인도를 손에 넣고 나면 만족했을까요? 아마도 만족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자는 훌륭한 욕망도 연습하고 노력해야 생긴다고 합니다. 정말 행복하고 싶다면 '존재 욕구'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내가 평생에 걸쳐 반드시 이루고픈 욕망은 무엇인가? 나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다면 자신의 인생을 곧고 튼실하게 가꿀 설계도를 손에 넣은 셈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생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남보다 두 배 노력해도 결과는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보다 열 배 떨어진다면 삶의 의욕이 있을까요? 아마 허탈과 분노가 가득한 삶을 살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공평한 측면도 있습니다. 부자라고 더 행복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도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선진국일수록 우울증 환자가 많고 자살이 빈번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생활고에 짓눌렸어도 늘 밝고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 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는 이들이 스스로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원숭이도 공정함을 원한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실험을 하면서 원수이들에게 토큰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원숭이들이 연구자에게 토큰을 내줄 때마다 오이 한 개씩을 주었습니다. 학승 능력이 뛰어난 원숭이들은 '거래의 법칙'을 재빨리 터득했습니다. 토큰 하나당 오이 한 개. 그렇게 얼마 동안 생물학자와 원숭이 간에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

 

 

이제 연구자들은 관행을 깨기 시작했습니다. 토큰을 받을 때마다 어떤 놈에게는 달콤한 포도를 준 것입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이 원숭이에게는 포도를, 저 원숭이에게는 오이를 주었을 뿐입니다. 물론 원숭이들은 포도를 더 좋아합니다. 거래의 법칙이 무너지나, 원숭이들은 난폭해졌습니다. '차별받는' 원숭이들은 오이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한 원숭이는 토큰을 우리 밖으로 집어던지기까지 했습니다.

 

나에게도 남들과 똑같은 몫을 달라고 말을 내뱉지는 못하지만 원숭이들에게도 '공평함'에 대한 감각이 있음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이러한 실험 결과를 토대로 '공평함은 분노와 배고픈 만큼이나 오래된 본능'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공정함에 대한 감각은 우리의 기본 감성 중 하나입니다. 남들이 누리는 편애와 특혜는 상당히 나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공정함이 우리의 본능이라고 해도 세상은 공평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불평등한 사회에 내던져졌습니다. 부유한 지, 가난한지, 어떤 나라의, 시민인지, 키나 지능 같은 유전요인을 어떻게 타고나는지 등등에 따라 우리는 서로 다른 출발선에 놓이게 됩니다. 유리한 쪽에 서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불리한 편에 놓인 사람에게 불평등한 상황은 못마땅합니다.

 

인간다운 죽음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우리는 나의 죽음으로 사회와 인류의 진화를 이끌 수 있다면 스스로 삶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적절한 죽음을 택하도록 가르침을 받기까지 합니다. 교과서를 쓰는 이들은 적의 장수를 껴안고 우러러보고, 전장에 나가기 전 직접 가족의 목을 벤 계백의 굳은 의지를 존경스럽게 서술합니다.

 

동물은 몸만으로 살지만 인간의 삶은 육체를 벗어났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합니다. 고대 로마 노예 반란의 지도자 스파르타쿠스는 기억되는 사람은 죽지 않는 법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풍요롭고 편안하게 살다 간 인물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지만,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경지에 이른 자들은 수 천년 뒤에도 기억됩니다. 큰 업적을 이루고 죽은 사람들은 영원히 기억되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죽은 사람들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 때 유럽과 일본에서 이름 모를 수많은 병사들이 죽었지만 그들 중 기억하는 사람은 아주 극 소수 일부일 뿐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로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그냥 던져졌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저자는 인간에게 철학함이 필요한 이유라고 합니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스스로 원해서 제작된 기계는 없습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 '에일리언 커버넌트'를 보면 이러한 물음을 잘 보여줍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공지능 '데이빗'은 자신을 만든 주인에게 저를 왜 만들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냥' 만들었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데이빗'은 크게 실망합니다. 이후 상영한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 '데이빗'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냅니다.

 

바로 인간을 통한 에일리언을 창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는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굉장히 폭력적으로 보여주었지만 실제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잘못 찾아가는 경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자의 말대로 우리의 일상이 튼실하고 건강할 때 이런 질문들을 던져 스스로 답해보는 철학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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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 - 나태함을 깨우는 철학의 날 선 물음들

그 어느 때보다도 생각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대다. 기계가 점점 더 교묘하게 발달하면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 주변은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알고리즘, 진실을 덮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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