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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리뷰

알쓸신잡3 강화도 신미양요 병인양요 젓국갈비 고인돌 뉴트로카페

by 워니의서재 2018. 12. 8.



◆ 젓국 갈비

알쓸신잡 3 강화도 편은 젓국갈비의 유래로 시작하였다.
젓국 갈비의 유래는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 왕실의 수도를 개성과 가까운 강화도로 옮기고,
왕에게 진상할 음식으로 강화의 특산물을 모아 대접할 음식을 만들게 되었다.


◆ 고인돌

고인돌은 전 세계의 40~60%가 우리나라에 있다. 고인돌 제작과정은 아래와 같다.



1. 인근 바위에서 돌을 채석한다.



2. 통나무를 아래 깔고 돌을 운반한다.



3. 땅을 파고 받침돌을 세운다.



4. 받침돌 주변에 흙을 쌓아 덮개돌을 끌어서 올린다.



5. 흙을 치우고 장례나 제례를 지낸다.



고인돌을 만든 원인을 추측하자면 당시에 계급제도, 사회 조직이 이미 형성되어있었고,
아무나 주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부족들이 있었을 것이고 권력을 과시하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고인돌을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도성에만 좋은 자료들을 놔두면 불타 거 없어질 수도 있어서, 태백산 정족산, 강화도에

복사본을 보관하였다. 그중 강화도에 있는 것이 외규장각이다.

의궤는 의례(행사)의 궤범(규범)이 된다 해서 의궤라고 불렀다.
<친 영 반차도>는 책 50면에 달하는 1299명의 인물 등장한다.


첫 번째 '전략적 요충지'는 초지진이다. 초지진은 강화해협을 공격하는 적들이 가장 먼저 진입하는 곳이다.
두 번째 '전략적 요충지'는 광성보이다. 물살이 빨라서 배가 지나갈 때 턴을 하면 속도가 느려진다.
광성보에 포대를 설치하면 물살 때문에 느려진 배를 쉽게 격추 시킬 수가 있다.






◆ 병인양요

병인양요 1차 침입 때 프랑스 군도 처음에는 물길을 파악하는 데 그쳤다.
병인양요는 프랑스 함대가 1866년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이다.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금악령으로 많은 천주교도들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조선에 10명 조금 넘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중 9명의 선교사를 죽이고,
천주교도 8000여 명(추정) 이 학살됐다. 조선을 탈출한 신부가 프랑스 제독 피에르 로즈에게
선교사들이 죽은 것을 알렸다. 그러자 선교사 학살을 비난하며 조약 체결을 요구하며 프랑스가 쳐들어왔다.



1866년 9월 프랑스의 공격이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14일 갑곶진을 점거하고 10월 16일 강화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에서 무기. 서적. 식량을 약탈했다. 당시 무기의 기술 차이가 굉장히 차이 났다. 조선 화승총의 사정거리는 100보
프랑스 소총 사정거리는 500 보이다. 김상욱 교수는 사정거리 5배를 손가락과 팔의 대결로 아주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프랑스 군함은 강화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물자를 차단하고 배회하다가 정족산성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큰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외규장각의 도서 수백 권과 기타 물자를 약탈하고 불을 지르고 철수하였다. 결과적으로 떠났기 때문에
조선은 국가적으로는 승리한 전쟁으로 간주했다.



◆ 신미양요

신미양요는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 침범한 사건이다. 신미양요의 원인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병인양요 직전이었던 1866년 7월 포와 총으로 무장한 미국 상선이 대동강 하구에서 통상을 요구했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펴던 조선은 셔먼 호의 출국을 요구했다. 그러나 셔먼호는 이를 듣지 않았고 이는 곧
무력 충돌로 이어진다. 결국 관민이 배를 불태우고 선원을 공격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군은
초지진을 공격 후 광성보 쪽으로 육군으로 공격하였다. 함대의 포격과 함께 국지전을 병행했다.
광성보에 있던 조선 수비군은 300여 명 미군 병력 약 600여 명.



광성보를 지키던 수비군이 전멸하였다. 이러한 조선인들의 행동을 보면서 미군은 당황한다.
자기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이 사람들은 왜 저렇게까지 저항하는 걸까' 전투가 일어난 해는 더운 6월
조선군은 미군 총의 성능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9겹 이상의 솜옷을 입었다.
그러나 오히려 솜옷에 불이 붙는 바람에 악영향을 주기도 했다. 광성보가 점령 당할 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학자들이 추측하길 솜옷에 불이 붙어 물로 뛰어들다 죽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미국은 1860년대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무기가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조선은 불을 붙이고 쏴야 하는 화승총을
사용 중이었고, 미군은 불을 붙이지 않아도 쏠 수 있는 소총이라서 이길수가 없는 전투였다.



이때 조선 대포의 포알은 폭발하지 않아 그냥 타격 용도로 쓰였다. 당시 미군의 피해는 사망자 3명, 부상자 10여 명
당시 그곳을 지키던 이재연 장군과 포로 20여 명이 죽고 미군은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미군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다가 2007년 장기 대여의 형태로 국내에 보관 중이다.
유시민 작가는 신미양요가 일어난 이유를 <관성의 법칙>에 비유하였다. 인간 사회에도 관성의 법칙이 있다.
조선이 유지해 온 사상과 사회구조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진주 민란 등 기존의 틀을 깨려는 사회 움직임들이
있었는데 사회의 요동을 가두고, 덮어 눌러 막던 시기다. 유시민 작가는 열어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닫아서 성공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인간의 기술 발전과 교통수단의 발전과 정보통신의 발전으로 인간 삶의 교류 범위는
계속 커져왔기 때문이다.

레트로 감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New + retro = 뉴트로라고 부르는 신조어가 나왔다.

뉴트로 카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TV를 보면서 가보고 싶어졌다. 굉장히 넓고 오래된 물건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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