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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인문학

게오르그 빌 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생애

by 워니의서재 2018. 12. 24.


게오르그 빌 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1770년 8월 27일 뷔르템베르크 공장력의 수도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헤겔은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의 아들이었다. 헤겔의 어머니는 뷔르템베르크 고등법원

변호사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운송 회계사 고문이었다. 이 회사는 뷔르템베르크 공작의 이익을 위해

존재했다.  헤겔이 열 세살 되던 해 헤겔의 어머니는 담즙증에 이은 고열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헤겔이

설교사가되길 원했다. 당시 설겨사는 영주를 위해 일하는 고소득 전문직이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노려볼 만한 직업이다. 그러나 헤겔의 관심은 현실에 있었다. 당시 독일은 봉건 영주들의 사치와 수탈이

극에 달했다. 백성과 재산은 적은데 당시의 부자나라 스페인 황제처럼 누리고 싶어 했다. 



18살에 튀빙겐대학교에 입학한 헤겔은 3인실 기숙사로 배정받았는데, 그곳에 룸메이트로 시인 휠덜린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명은 루터파 신학자 아버지를 둔 셸링이 있었다. 훗날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프리드리히 휠덜린,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세명의 프리드리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재는 셸링

이었다. 셸링은 10대 때부터 주목받았다. 셸링은 23살 나이에 예나대학교 철학과 정교수로 취임했다.

헤겔은 서른이 될 때까지 셸링에게 철학을 배우다시피 했다.



헤겔은 어수룩하지만 성실한, 자신이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될 동네 형 같은 사람이었다.

20대에 존경받는 철학자가 된 셸링과 달리 헤겔은 늦은 나이까지 아버지가 정한 진로에 억눌려 원하던

철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20대의 헤겔은 7년 동안이나 가난한 가정교사 생활을 전전하며 몰래 철학

논문을 집필했다. 무명 중의 무명인 그의 원고를 출간해줄 출판업자도 없었고 감히 아버지 앞에서 철학

으로 전향할 수도 없었다. 헤겔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비로소 철학의 길로 돌아선다. 서른이 넘은

나이였다. 1805년 헤겔은 예나대학교에 원외교수로 출근하게 되었다. 월급도 나오지 않는 비정규직

이었지만 경력이 간절한 헤겔은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1806년에 나폴레옹이 독일 쳐들어왔다.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를 박살낸 나폴레옹은 말을 타고

새 점령지를 둘러보았다. 발코니에서 지나쳐가는 나폴레옹을 내려다본 헤겔은 "저기 말을 탄 세계정신이

지나간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807년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출간했다. 서구문명의 문화, 사상, 종교를

하나의 패턴으로 설명한다. 셸링의 하락세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정신현상학'을 읽고 자기를 비판했다는 이유

였다. 어릴때부터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관대함은 자신이 주인공일 때에만 발휘된다.



'정신현상학'출간 이후 셸링의 지위는 독일의 미래에서 '헤겔 선생의 친구'로 낮춰졌다. 1808년 헤겔은 

뉘른베르크 김나지움 교장으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 예나를 떠났다. 뉘른베르크에서는 헤겔을 

김나지움 교장으로 모시는 조건으로 한가지 부탁을 했다. '정신현상학'을 학교 수업 교재로 사용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1811년에 헤겔은 결혼 21살 어린 20살의 신부와 결혼했다. 그는 1816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로 이직하였다.



1818년에는 베를린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8년간 VIP 신분으로 빈, 파리,

프라하 등을 돌며 명사들을 만나고 강연도 하는 생활을 누렸다. 1830년에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 땅을 하나의 체제로 편입시켰다. 프로이센 국왕은 헤겔을

기사로 서임했고 정식으로 귀족이 되었다.



[워니의 책리뷰/인문학] -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국내도서
저자 : 홍대선
출판 : 푸른숲 2018.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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