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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이진우 교수의 철학강의 의심의 철학

by 워니의서재 2019. 1. 15.


이 책의 제목처럼 모든것을 의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철학자들을 소개한다.

역사를 의심한 마르크스부터 신을 의심한 니체, 의식을 의심한 프로이트,

존재를 의심한 하이데거, 언어를 의심한 비트겐슈타인 등으로 총 10명의 철학자

들로 구성되어 있다.



헤겔은 이성이 이 세상과 역사를 지배한다고 해석했다. 마르크스는 이 지점을 비판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이성적이라는 철학적 전제를 받아들이다고 가정하고  인류의

역사가 온갖 명분으로 자행한 대학살, 착취, 잔혹한 전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으로

진행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역사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정신을 규정 하는 것은 오히려 현실의 물질적 조건이다.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 이 아니다. 자신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다.

 


니체의 신이 죽었다는 의미는? 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가

없다는 의미다.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 사라졌다

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에서 신의 죽음을 전달한 광인은 등불을 들고

나타났다가 등불을 내던진다. 이 책에서 등불은 계몽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스러운 이성의 빛'이 등불이다. 니체가 예고한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는 '방향상실'

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는 "자아는 자기 자신의 집주인이 아니다"라는 말로 이제까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고 믿었던 이성과 의식을 철학의 왕좌로부터 끌어내내렸다. 프로이트는 억압을 통해

어떤 표상이 의식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을 때 '무의식'의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억압

된 것이 억압된채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

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리를 위협하는 고통은 대체로 세 방향에서 온다고 한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육체, 둘째는 외부 세계, 그리고 셋째는 관계다.



"자아에 길들여지지 안은 본능적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은 길들여진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과는 비교할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행복감을 준다." 사람들은 불행을 면했거나 고통을

이겨낸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문명이 발전

한다.



하이데거는 1919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행한 강의에서 강단을 예로 설명했다.

저기에 '강단'이 있다. 여기서 강단은 존재자고, 있음은 강단의 존재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교실에 들어서면서 강단을 보고 약간 높게 만들어진 "직각으로 된 갈색의

면"으로 인지하는 것이 일상적 체험은 아니다. 강단은 하이에거가 학생들에게 강의

하는 자리이고, 그 위에는 교재처럼 보이는 책이 놓여 있고, 교탁은 교수에 비해 조금

높이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강단을 항상 특정한 조명과 배경을 같은 맥락

에서 바라본다. 그러기에 강단이 저기에 있다는 사실의 의미는 강단이란 존재자를

설명한다고 해서 해명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든 우리는 모두

'세계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계-내-존재는 인간 실존의 근본 양식이다.


대중의 교통수단을 사용하면서, 정보매체를 이용하고 타인은 모두 같은 타인인

셈이다. 서로 함께 있음은 고유한 현존재를 완전히 '타인들의 존재 양식'소으로

해체해버리며, 그래서 타인들의 차별성과 두드러짐이 더욱더 사라져버리게 된다.


우리는 남들이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읽고 보며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 판단한다.

또한 우리는 남들이 그렇게 하듯 '군중'으로부터 물러서기도 한다. 남들이 격분

하는 것에는 우리도 격분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무릇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말할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 언어는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표현하는 것이고,

이성도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특징을 인식하여 이 특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유에 한계를 성정한다는 것은 생각한 것, 즉 '사상의 표현'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사상은 오직 언어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면, 사유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곧 언어에 한계를 긋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세계를 마주하고 최초로 행하는 언어 행위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이름 짓기'다.

우리와 관계를 맺는 사물들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동시에 '관계 맺기'다. 우리가

명명한 이름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세계를 서술하고 인식

한다.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는에 따르면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계몽의 프로그램은 세계의 '탈마법화'였다. 계몽은 '신화'를 해체

하고 '지식'에 의해 상상력을 붕괴시키려 한다.


자연이 공포의 원천이라면, 우리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의 성격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도구적 이성

에 의한 계몽은 자연을 오로지 계산과 지배의 대상으로만 파악한다.



장폴 사르트르에 따르면 개인은 공동체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가치와 방침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직업적 역할을 하나의 기계처럼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광경을 바라

보며 사르트르는 카페의 종업원이 "이 잉크병이 잉크병"으로 있고' 컵이 컵'으로 있는

것'과 같은 뜻으로" 실존한다고 묘사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유를 실천하는

한에서만 자유롭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 자신의 삶, 실현된 자유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선택을 지속적으로 미루고 다른 삶을 꿈꾸기만 하는 사람은

자유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기만한다. 자유가 우리에게 원초적으로

부여된 불안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방식이라면, '자기기만'은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수동적 방식이다.



우리는 자유로도록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유를 실천할 능력이 없어서

여러 가지 핑계를 댄다면, 이는 불안을 외면하고자 하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베냐민은 작품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아우라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안개에 싸인 베네치아의 해안가를 걸으면서 독특한 아우라를 느꼈다고

하더라도, 여행 사진은 결코 이 아우라를 할께 재현하지 못한다. 복제가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예술 작품이 갖고 있는 일회성은 복제하지 못한다.



이 신발을 바라보면서 단지 하나의 생활용품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신발을

신고서 힘들고 고된 밭일을 했을 농부의 고난과 고독을 느꼈다면, 그것은 이 신발에

묘사된 아우라를 숨쉰 것이다. 그러나 오느날 이 그림을 보면서 농부의 고된 삶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 없을것이다.



칼포퍼에 의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은 가설적이다. 이 가설은 경험보다 직관과

상상력에서 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가설의 타당성은 오직 경험적 적용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과학 이론의 발전 역시 끊임없

는 반증과 오류 제거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어떤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발전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더 잘

실패할수 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저술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라 할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때 아이히만은 양심에 따라 행위하는 것은 바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칸트의 정언명령을 거의 정확하게 인용하였다. 아이히만은 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라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칸트의 도덕철학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인간은 실정법에 대한 단순한 복종을 넘어서 법의 배후에

있는 보편적 원리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에 복종하는 것을 양심의 요구라고 생각한다.


그런 아이히만 모습을 보면서 아렌트는 사회적 악은 타인과 사회에 대한 평범한

무관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는 원초적 폭력성과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바로 악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악에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 조직이다. 한나 아렌트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수 없는 무능력함

이 사회적 악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의심의 철학
국내도서
저자 : 이진우
출판 : 휴머니스트 2017.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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