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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인문학

쿠바혁명 체 게바라 여행에서 혁명을 꿈꾸다.

by 워니의서재 2019. 3. 8.

1928년 6월 14일.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동쪽에 있는 로사리오에서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 사이에서 다섯 아이들 가운데 첫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체게바라의의 부모는 아르헨티나의 상류계급 출신이었지만 결코 보수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쪽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어머니 셀리아 또한 의지가 강하고 사상과 문화에 대한 열정이 높았다.





그녀는 집을 책과 예술가, 보헤미안, 지식인들로 가득 채웠다. 체게바라가 여행을 좋아했던 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이들의 인생은 대부분 부모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체게바라는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받은 것은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이 아니었다. 그가 받은 것은 사랑과 열정이다. 훗날 그가 보여 준 라틴 민중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아메리카 혁명에 대한 무한한 열정은 모두 그로부터 비롯 된 것이었다.





1929년에 체게바라 가족은 미시오네스 지방으로 이사한다. 이곳에서 체게바라 아버지는 아르헨티나 국민 음료 '마테 차'를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을 시작했고, 같은 해에 여동생 셀리아가 태어났다. 그는 '마테 차' 농장을 하다가 선박을 건조하는 일을 도맡아 했고, 나중에 건축가 및 건설 청부업자로 일하면서 종종 경제적 곤경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럭적럭 가족을을 부양해갔다.





1932년 체게바라의 천식이 심해지자 가족은 건조한 기후를 찾아 코르도바 지방에 있는 알타 그라시아로 이사했다. 그 해에 남동생인 로베르토가 태어났고 2년후인 1934년에는 여동생 아나 마리아가 태어났다. 체게바라가 두 살 때 앓은 심한 천식은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혔지만 천식과 싸워 이기려는 그의 노력은 내부에 강한 의지력을 심어 주었으며, 오히려 그의 정신을 강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학교에 가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체게바라는 그 때문에 주눅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집에서 프랑스어를 가르키고 어린 체게바라는 다양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열두 살에는 이미 프랑스 시를 원어로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아이의 건강을 위해 스포츠를 권했는데, 그 이후 그는 열정적으로 스포츠에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 그는 수영과 승마, 축구, 럭비, 탁구, 사격, 비행 골프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체스에서도 남다른 솜씨를 발휘했다.





1943년에는 남동생 후안 마르틴이 태었다. 체게바라도 동생 로베르트와 테니스와 골프를 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비록 종종 천식이 발병하여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럴수록 체게바라의 의지와 열정은 더 커지는것 같았다.





1945년 체게바라 가족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했다. 1947년 열아홉이 된 체게바라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 대학에 입학했다. 의대생이 된 체게바라는 학교 생활에 집중했다. 럭비와 축구, 수영을 즐겼고 제 1회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릴 무렵에는 체스 선수권 대회와 장대높이뛰기 선수권 대회에도 참여했다. 운동을 하지 않을 때는 도서관에서 몇 시간씩 보내며 철학과, 정치학, 심리학 같은 분야의 책을 폭 넓게 읽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학교의 시험을 전부 통과했다.





1951년이 저물어갈 무렵 기말 시험에 통과한 체게바라는 이미 의사가 되어 있던 알베르토와 함께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12월에 칠레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장장 4,50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이었다. 체게바라와 알베르토는 라 포데로사(힘센 녀석)라고 이름붙인 노턴 500cc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지만 오토바이가 망가진 이후에는 차를 얻어타면서 여행해야 했다.





체게바라와 알베르토는 여행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고 많을 읽을 겪었다. 그들이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들도 있었고 상류사회의 대단한 인물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만남들이 모두 체게바라의 정신을 관통하고 있었다.





칠레에서 체게바라는 구리 광산인 '추키카마타'에 들렀다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콜럼버스가 대륙에 발을 들이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 광산은 그들의 조상들에게는 거대한 태양의 사원이었지만, 새로운 정복자들이 침략후 그들의 후손들에게는 거대한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소작농과 노동자들은 빈곤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착취당하고 있었다. 체게바라는 이후 공산주의자인 칠레 노동자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그들은 1948년 봉기 때 투옥된 사람들이었다.





1952년 4월3일, 체게바라와 알베르토는 마침내 '마추픽추'에 올랐다. 남아메리카를 일주하는 첫 번째 여행길에서 그는 페루의 산꼭대기에 있는 이 도시에 남아 있는 고대 잉카문명 유적을 보고 완전히 압도당했다. 이후 체게바라와 알베르토는 한동안 페루의 나환자촌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체게바라는 성심껏 환자들을 돌보고 직접 수술을 하기도 하면서 의사로서 직무를 다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콜롬비아의 보고타로 갔다.





그곳은 1948년 봉기 뒤에 일어난 내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제 9개월에 걸친 긴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내부에 꿈틀거리는 혁명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 도착 했을 때, 알베르토는 실험실에서 일하기 위해 그곳에 머물렀고 체게바라는 마이애미로 날아갔다가 마지막 의사실험을 치르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1952년 9월에 여행에서 돌아온 체게바라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르헨티나 땅에 발을 디뎠던 그 순간, 이글을 쓴 사람은 사라지고 없는 셈이다.

이 글을 다시 구성하며 다듬는 나는 더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의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했다."



체 게바라 자서전
국내도서
저자 :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 박지민역
출판 : 황매 201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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