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로마의 조영관으로 선출되면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조영관은 식량공급을 관리하고 축제와 각종 경기의 운영을 책임지는 관직이었다. 카이사르는 야생동물 사냥, 화려한 검투사 시합, 연극 콘테스트 등 여러 행사와 볼거리들을 적시에 개최하여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몇몇 행사와 경기들은 자비를 들여 개최하기도 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들으면 화려하고 인기 많은 행사를 떠올렸다. 이러한 대중들의 인기는 그가 나중에 집정관이 될 때까지 권력의 토대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뛰어난 흥행사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기원전 49년, 두 경쟁자인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어 내전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느 날 카이사르는 연극 공연을 관람한 뒤에 깊은 생각에 잠겨 천천히 어둠 속을 걷다가 루비콘 강가의 진지로 돌아갔다. 루비콘은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경계 짓는 강이었고, 갈리아는 그가 이미 정복한 땅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들어간다는 것은 폼페이우스와 전쟁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카이사르는 참모들 앞에서 루비콘 강을 건널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독백을 했다. 그리고 강가에 나타난 키 큰 병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병사는 나팔을 불다가 잠시 후 루비콘 강의 다리를 건너갔다. “저것을 신이 보내는 신호로 생각하자. 적들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그 신호를 따르자.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 카이사르는 손으로 루비콘 강을 가리키고 시선은 장군들에게로 향한 채 엄숙하고 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사실 장군들은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웅변에 압도되어 마음을 바꾸었다. 평범하고 단조로운 연설이었다면 결코 그러한 효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장군들은 같은 대의를 향해 하나로 뭉쳤다.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고 이듬해 폼페이우스를 무찔렀다. 이후 카이사르는 로마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서 항상 힘 있고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말 타는 솜씨는 그 어떤 병사에도 뒤지지 않았고, 용맹함과 인내력을 발휘해서 뛰어난 공적들을 이루곤 했다. 가장 힘센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가 군대를 지휘하는 카이사르의 모습을 보면서 병사들은 그를 신과 같은 존재로 느꼈다. 카이사르는 병사들이 따라야 할 모델이 되었다. 로마에 있는 모든 군대들 중에서 카이사르의 군대가 가장 충성심이 강했다. 과거 그가 기획한 행사들에 열광했던 시민들처럼, 병사들은 그의 목표와 일체감을 느꼈다.
폼페이우스를 무찌르고 난 후 공연과 행사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전차 경주는 더 화려해졌고 검투사 시합은 극적인 요소가 한층 강해졌다. 카이사르는 귀족들끼리 싸워 죽음까지 이르는 시합을 조직하기도 했다. 인공호수를 만들어 가상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
로마 도처에서 연극이 공연되었고 타르페이아 바위가 있는 산에 커다란 극장이 새로 지어졌다. 사람들이 공연을 보기 위해 곳곳에서 모여드는 바람에 로마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천막이 세워졌다. 기원전 45년,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전투를 끝내고 로마로 돌아올 때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를 데리고 와서 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것들은 단순히 대중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대중은 카이사르를 실제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대중적 이미지 관리에 능한 고수였다. 그는 대중 앞에 나설 때 가장 화려하고 멋진 자줏빛 옷을 입었다. 카이사르는 사람들한테 가장 인기 있고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카이사르는 외모에 대한 허영심이 강했다.
원로원이나 군중 앞에 나설 때는 항상 월계관을 썼는데, 이는 대머리를 가리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카이사르는 뛰어난 웅변가였다. 적게 말하면서 많은 것을 전달하는 법을 알았으며,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언제 연설을 끝내야 할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대중 앞에 나설 때면 항상 깜짝 놀랄 만한 무언가를 계획했고, 극적 효과를 높이는 발언을 준비했다.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들에게는 인기 있었지만 경쟁자들에게는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주도하는 일단의 음모자들이 원로원에서 그를 칼로 찔러 죽였다. 카이사르는 심지어 죽어가면서도 극적 효과를 잊지 않았다. 그는 옷을 끌어올려 얼굴을 덮고 옷의 아랫부분은 다리 위에 걸쳐 드리워지도록 하여, 천에 덮인 채 품위 있는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말에 따르면, 브루투스가 두 번째 칼을 찌르려고 하자 카이사르는 그리스어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마지막 말을 던졌다고 한다. 마치 연극 대사처럼 말이다.
해석 ──
로마에서 연극은 대중을 위한 행사였다. 사람들은 객석을 가득 채우고 앉아서, 희극을 보면 웃고 슬픈 비극을 보면 눈물을 흘렸다. 연극은 삶의 희로애락을 극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마치 종교적인 의식처럼 연극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즉각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권력과 연극 사이의 중요한 관계를 처음으로 간파한 정치인일 것이다. 이것은 그가 연극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이사르는 세계라는 무대에서 스스로 배우이자 연출자가 됨으로써 연극에 대한 애정을 또 다른 형태로 승화시켰다. 그는 대본을 읽듯이 말을 했으며 몸짓과 행동을 할 때는 자신의 모습이 청중에게 어떻게 비칠지 늘 의식했다. 이따금 대중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장치를 활용했고 연설에 극적 요소를 가미했다. 연설할 때는 몸짓과 손짓을 크게 하여 시민들이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그 덕분에 카이사르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카이사르는 모든 리더와 권력자들이 이상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다. 당신도 놀랄 만한 요소, 긴장감, 정서적 공감, 대상과의 상징적 일체감 등의 극적인 장치를 이용해 영향력을 강화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아울러 카이사르처럼 항상 청중을 의식해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을 지루해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당신은 늘 무대의 중심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하며 그 자리를 누구에게도 내주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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