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사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가정 네 가지
첫째,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가 의식적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잘못되었어요. 대부분의 사고, 추정컨대 98퍼센트는 완전히 무의식적입니다.
둘째,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합리성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신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이 믿음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추론은 물리적 과정으로서, 우리의 신체와 뇌의 물리적 실재에 의존합니다.
셋째, 많은 사람들은 추론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사유한다는 의미예요. 이 역시 참이 아닙니다. 사람들 모두가 하나의 보편적인 추론 방식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죠. 사람들은 세계에 대해 서로 다르게 사유합니다. 저마다의 문화적 경험과 개인적 경험을 통해 마음속에서 변별적인 구조를 습득해왔기 때문입니다.
넷째, 사람들은 인간이 축자적으로 세계 내에 존재하는 그대로 사물을 이해할 수 있으며, 사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니에요,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은유를 통해 사유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거의 의식조차 못 하죠. 예컨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쉽게 추론하거나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유가 어떻게 정치적 사고와 정치적 행위를 정의하는지, 어떻게 실제로 국가 간 전쟁을 초래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 인지의 기본적인 기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일상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대개는 은유를 통해서 이해합니다.
은유에 대한 관습적인 이해와는 완전히 다르게 들립니다. 그러한 이해에 따르면 은유는 언어, 오직 언어만의 문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예술적인 언어 형식’이라고 기술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유를 낱말이나 언어의 문제로 여깁니다. 이런 생각은 서구 학계에서 2,500년 이상을 지배해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40년에 걸쳐 인지과학은 이 발상을 완전히 뒤집는 연구 결과를 내어놓았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인간의 언어와 사고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전통적인 가정들 중 많은 부분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유가 결코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은유는 우리의 일상적 인지, 즉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구조화합니다. 은유는 사고의 문제이고, 언어의 문제이며, 행위의 문제입니다.
개념적 은유 이론(Conceptual Metaphor Theory) : 은유가 시인이나 능변가의 전유물로서 언어의 일탈적 사용과 장식적인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은유관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은유의 소재는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개념 체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혁신적인 은유 이론이다.
이 이론은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와 철학자 마크 존슨(Mark L. Johnson)이 1980년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라는 단행본에서 ‘인간의 사고와 인지 과정의 대부분이 은유적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은유는 소수 천재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능력’이라고 주장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조지 레이코프는 1970년대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언어학과의 젊은 교수였고, 그해 봄 학기에 은유 강좌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오후였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죠. 이곳은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이고, 언제나 비가 옵니다.
학생들은 관습적 은유에 대한 이런저런 텍스트를 읽으며 몇 주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의 독서노트에 대한 토의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수업을 시작한 지 15분쯤 지났을 때 강의실 문이 열렸고, 비에 흠뻑 젖은 여학생이 한 명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한 후 자리에 앉았습니다.
무척 괴로워 보였지만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의를 계속했습니다. 드디어 자신의 독서노트에 대해 언급할 차례가 오자 그녀가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몇 마디 못 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놀라고 염려하는 눈빛을 보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인지 물었고, 그녀는 흐느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남자 친구와 은유 문제를 겪고 있어요. 아마도 여러분은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 거예요. 제 남자 친구가 말하길, 우리의 관계가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랐다고 해요.”
자, 한번 떠올려봅시다. 1970년대이고, 우리는 버클리에 있습니다. 버클리대학은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에 있고, 언론자유운동의 본산이자 1968년 문화혁명의 진원지이죠. 우리는 특별한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의 시대정신 속에서 그 학생이 겪고 있는 개인적인 위기를 포용하려 했습니다. 그녀가 당면한 위기에 대해 집단 토론을 하기로 결정했죠.
우리는 치료 목적을 갖는 이 집단 토론 속으로 꽤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아요, 당신의 남자 친구는 둘의 관계가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했어요. 그 말은 두 사람이 함께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없다는 의미이죠. 길을 되돌아 나와야 할지 모른다는 의미 말이에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랑을 여행의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실례들을 모아봤습니다. “울퉁불퉁한 길이었어.” “우리는 갈림길에 있다.” 등이었죠. 그리고 우리는 은유가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언어 표현의 이면에 놓여 있는 사유 활동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여학생의 남자 친구는 이별을 단지 수사적으로 아름답게 전하기 위해 은유를 사용한 게 아니라, 은유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 추론이 표현된 거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관계가 탈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막다른 골목길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이곳저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탈것 말이에요.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 관계를 끝내기로, 즉 탈것에서 내리기로 결심했던 것이죠.
그는 아주 흔한 은유, 바로 [사랑은 여행]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연인 관계를 시작할 때 이 은유를 사용하죠. 그런데 그에게는 이 은유가 자신을 아무 데도 데려다주지 않는 교착 상태를 끝내기 위한 의미로 쓰였습니다.그 여학생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녀는 행복한 결혼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남자와.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만약 우리의 사고에서 나오지 않는다면요.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조지 레이코프 & 엘리자베스 웨흘링 지음, 나익주 옮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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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사람들은 참 무언가에 은유하고 비유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은유를 통해 보수정치인이나 보수언론들이 어떻게 프레임을 만들고 사람들의 생각을 조종하는지 잘 쓰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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