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에 따르면 나도 주체이고 타자도 주체입니다. 다시 말해 나도 타자도 모두 미래를 향해 자유롭게 실존하면서 각자의 본질을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타자는 그의 시선을 통해 출현하자마자 나의 이러한 '기투'를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시선을 통해 나를 객체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타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일자
철학에서 '일자'는 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오고 들어가는 단 하나의 절대자, 세상 모든 것의 제1의 원칙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이 개념은 기독교의 신 개념과 결합되고, 코기토를 내세운 데카르트 이후에는 사유의 주체인 인간 개념, 특히 '나'와 결합됩니다.
◆타자
'타자' 개념을 사용할 때는 주의를 요한다. 일반적으로 '타자'는 인격으로서의 '타인'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타자'는 은유적으로 '일자'에 의해 억압을 당한 '타자들'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기투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 존재는 아무런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백지상태'로 태어납니다. 이 상태에서 인간 존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창조해갑니다. 다시 말해, '실존'하면서 자신의 본질을 가지게 됩니다. 이때 인간 존재가 자기 자신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을 사트르르는 기투로 표현합니다.
타자가 나를 전혀 바라볼 수 없는 상태에서 내가 그를 일방적으로 보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내가 타자를 본다는 것은 그대로 그에게 나를 객체화시킬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그를 일방적으로 객체화시키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신을 인간의 시선에 의해 '영원히 객체화되지 않는 시선'으로 규정합니다.
사르트르는 타자를 나를 바라보면서 나를 객체화시키기 때문에, 내게는 그의 시선에 포착된 내 모습이 중요합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 모습은 전적으로 타자의 자유의 소관사항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결코 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평생 나의 존재 근거를 찾아가야만 하는 상황이죠. 이런 상황에서 타자의 시선에 포착된 나의 모습은 그대로 나의 존재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논리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에 대해서 알려면 나는 반드시 타자를 통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됩니다.
시선을 통해 출현하는 타자의 나에 대한 존재론적 지위가 이중적이며 상반되기 때문에, 나는 타자와의 관계 정립을 하면서 두 개의 상반된 태도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입니다.
제1태도는 앞에서 살펴본 타자의 두 번째 존재론적 지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타자는 주체로서 나를 바라보면서 나에게 존재 근거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나는 그의 자유, 시선 위에 그려지는 나의 객체화된 모습에 동화되어 그것을 내 안으로 흡수하려고 합니다.
제2태도는 내가 주체로 타자를 바라보면서 그의 자유, 시선을 초월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초월의 태도입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언어는 사랑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말하는 자도 주체여야 하고, 그의 말을 듣는 자도 주체여야 합니다. 하지만 언어는 반드시 소외를 겪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말하는 자의 의도는 반드시 듣는 자에 의해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왜곡의 가능성이 있는 한, 언어 역시 사랑과 마찬가지로 실패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르트르의 타자론의 질문.
과연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갈등과 투쟁밖에 없는 것인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허용될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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