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 전쟁 이전 조선 상황
갑오농민 전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조직적인 민중 운동이었습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탐관오리인 고부 군수 조병갑의 행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고부에는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논에 대주는 만석보가 있었는데, 조병갑은 백성들에게 품삯도 안 주고 일을 시켜서 멀쩡한 만석보 아래에 새로 보를 만든 다음 물세를 챙겨 먹었습니다.
또한 제 아비 추모비를 세운다고 돈을 걷기도 하고, 세금은 좋은 쌀로 거둔 뒤 나라에 낼 때에는 나쁜 쌀로 내면서 그 차액을 떼어먹기도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조병갑의 행패를 견디지 못해 떼를 지어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앞장섰던 전봉준의 아버지가 잡혀가 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호남 지역에 집중된 극심한 수탈입니다. 당시 호남은 국가 재정의 40%를 감당하던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서울 사람들의 노랫가락에는 '아들 낳아 호남에 원살이 보내고 지고'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아들 낳아 과거 시험에 급제한 뒤 서울의 중앙 정부에서 높은 벼슬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호남의 고을 원님이 되었으며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호남에서 원님 노릇 한번 하면 죽을 때까지 가족 전체가 먹고살고도 남을 재산을 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균 전사에서는 당시 김제 등지의 황무지를 백성들에게 개간하고 그 땅에 농사를 지으면 세금을 매지기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땅이 다 개간되자 세금을 걷었습니다. 그리고 봉건 권력의 행동대 역할을 하는 보부상들의 횡포도 날이 갈수록 심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청나라와 일본의 장사꾼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쌀을 많이 사가서 국내에 쌀이 부족하게 되었고 상권도 위축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얽히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갔고 결국 갑오 농민전쟁이 발발합니다.
◈갑오농민 전쟁 1단계
갑오농민전쟁의 1단계는 고부 봉기입니다. 철저한 계획을 세운 전봉준은 1894년 1월 10일 농민군 1000여 명을 이끌고 두 갈래 길로 나누어 고부 관아 공격하면서 한쪽 길을 도망갈 수 있도록 일부러 터주었습니다. 모든 병력이 소모될 때까지 싸우는 것보다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전봉준은 남아있던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새로 만든 보를 부숴 버립니다. 그리고 양곡 창고를 개방하여 어려운 배석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이 사건으로 전봉준은 이름 없는 신참 접주에서 유명한 인물로 떠오르게 됩니다. 전봉준이 이끄는 봉기 군은 15일 동안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시위를 벌이다가 백산으로 물러나 성을 쌓고 머물면서 호남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참여하길 기다립니다.
그러나 날씨가 추운 탓에 농민들은 별로 참여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추수한 뒤라 아직은 먹고살 것이 있어서 농민들의 불만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이 참여하지 않았던 가장 큰 문제는 호남의 대접주 김개남 포와 손화중 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전봉준이 처음 거사를 모의했을 때에는 고부성을 점령하고 조병갑을 처형한 다음 전주 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호남 동학의 지원 없이 계획을 밀고 나가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안 가 해산하게 됩니다. 그 뒤 도망쳤던 조병갑은 의금부에 갇혔지만 장흥 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 와서 농민들의 책임을 물어 잡아 가두고 죽입니다.
◈갑오농민 전쟁 2단계
농민군은 3월 21일 고부, 태인 등지에서 다시 일어섭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전봉준은 어느새 총대장이 되어있었고, 김개남과 손화중이 전봉준의 지휘를 받는 총관령이 되었습니다.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잘 훈련된 전주 병영의 관군과 보부상 연합군을 맞아 싸웠습니다. 이 싸움에서 농민군은 첫 번째 승리를 거둡니다.
농민군 위세에 놀란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초토사로 삼아 서울 방위를 맡고 있던 군대와 외세의 침략을 막는 최일선의 강화도 군대를 합쳐 2000여 명의 병력을 급히 내려 보냅니다. 농민군은 이들 최정예 부대를 전라도 깊숙이 유인해 들인 뒤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농민군은 관군의 총알을 장태를 이용해서 막아냅니다. 장태는 긴 대나무를 엮어 만든 커다란 원통입니다. 이 원통을 굴려가며 진격해서 관군 300명가량을 섬멸하고 승리하였습니다. 그 사이 호남 깊숙이 들어갔던 관군을 우회해서 농민군의 다른 부대가 4월 28일 전주성에 들어갑니다.
◈갑오농민 전쟁 3단계
승리한 농민군은 전라도 53주 전역에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집강소는 최초로 농민과 천민이 중심이 된 자치기구였습니다.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민중 대다수의 뜻을 반영한 27개 조항의 개혁을 요구합니다. 그 대부분은 삼정문란에 대한 시정, 탐관오리 처벌, 상인과 아전들의 횡포의 대한 불만입니다.
27개 조의 제정 개혁안은 전주 평화조약 이후 집강소에서 펼친 12개 페정 개혁안으로 발전합니다. 12개 페정 개혁안은 동학과 정부의 갈등 해소 노력, 봉건적 지배 체제의 청산을 위한 실천, 노비 문서를 없애고 과부의 재혼을 허용하는 평등 사회의 실현, 토지를 똑같이 나누어 신분 평등을 보장할 물적 토대의 확보를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집강소는 진주성 싸움 이후 소강상태에 들어간 6월 무렵부터 9월 12일 재봉기까지의 기간에 민중이 자신들의 이상을 실험해 본 것입니다. 비록 완전한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지만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자신들의 성숙된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평화조약이 맺어진 뒤 대다수 농민군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전라도 대부분 수령이 도망간 탓에 전란의 뒷수습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집강소는 포와 접을 중심으로 관할 지역을 나눈 확대된 형태의 군사 공동체이자 종교 공동체, 생산 공동체였으며, 기존의 관청과 달리 이념과 조직을 활용한 생활 공동체였습니다.
그 이후 전봉준이 전라 우도를 맡고 김개남이 좌도를 맡았습니다. 전봉준은 온건한 정책을 펼쳤다면 김개남은 남원 수령이 반기를 들었다고 즉결 처단할 만큼 매우 개혁적이었습니다. 더구나 두 사람의 불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한 번은 대원군이 전령을 보내자 어명을 말하려는 사람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편지가 왔다는 사실을 안 전봉준이 사람을 보내와 죽이라고 전갈하자, 조금 전까지도 죽이려 하던 김개남이 오히려 전봉준이 죽인 책임을 다 자신에게 덮어 씌우려 한다고 하면서 살려줍니다. 이 둘이 이렇게 갈등하는 사이에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을 맺습니다.
추수절이 끝날 무렵 군량 확보에 문제가 없어지고 농민군은 전주성을 떠나 서울로 향합니다. 북접을 지도하는 최시형은 처음에 전봉준을 국가의 역적, 시 문란적으로 지목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민군이 북상을 시작하자 손병희에게 북접 농민군을 이끌고 내려가 남 접을 막으려고 벌 남기를 주어 보냅니다.
벌남이란 잘못을 저지른 남 접을 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같은 동지들을 칠 수 없는 옹민들은 무력 봉기를 선언하면서 남접과의 합류를 지시합니다. 논산 벌에서 마주했던 20만의 남북 접 농민군은 북접 지휘자 손병희가 벌 남기를 찢는 순간 하나가 됩니다.
사기가 오른 농민군이 충청도의 중심 공주성을 둘러싸고 전투했지만 결국 패하게 됩니다. 당시 농민군의 모습을 가리켜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농민군이 산을 뒤덮었기 때문에 이들이 서있으면 사람들이 흰 옷 때문에 온통 흰 산이 되는 것이고, 제자리에 앉으면 그들이 들고 있던 죽창만 빼곡히 서 있기 때문에 대나무 산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농민군도 막강한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양반들이 곳곳에 빈 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을 공격 중이었습니다. 일본군이 뒤로 상륙해서 공격할까 봐 손화중과 나경선이 병력을 나누어 나주를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민군 지도부에는 상당한 벼슬을 지낸 양반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양반 한 명이 성안의 관군에게 같이 힘을 합쳐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호소문을 보냅니다. 그러나 무산되었고, 2500명의 관군과 200명 일본군을 감당하지 못해 농민군은 마침내 우금치에서 패하였습니다.
전봉준은 배신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전봉준에게 회유책을 쓰면서 일본 망명을 권하였으나, 한치의 흔들림 없이 전봉준은 그냥 죽음을 택합니다. 흩어진 농민군들은 화적이 되기도 하고 부자들을 털어서 가난한 자를 돕는 활빈당이나 영학당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의병 운동으로 넘어갑니다.
※참고자료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110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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