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이 낮선 도시에서 왜 자꾸만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르는 걸까? 거리를 걸을 때 내 얶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말, 스쳐지나가는 표지판들에 적힌 거의 모든 단어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상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지금 이 도시는 새벽안개에 잠겨 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졌다. 내가 바라보는 창으로부터 사오미터 거리에 있는 높다란 미루마루 두 그루가 먼색 윤곽을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을 뿐, 그 밖의 모든 것이 희다. 아니, 저것을 희다고 할수 있을까? 검게 젖은 어둠을 차가운 입자마다 머금고, 이승과 저승 사이를 소리없이 일렁이는 저 거대한 물의 움직임을?
오래전 이렇게 안개가 짙었던 섬의 아침을 기억한다. 함께 여행을 떠난 일행들과 바닷가 절벽 길을 산책했었다. 어른어른 모습을 드러낸 해변의 소나무들. 깍아지른 쟂빛 벼랑. 해무 아래 일렁이는 검은 바다를 내려다보던,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서늘해 보이던 일행들의 뒷모습.
하지만 다음날 오후 같은 길을 걸으며, 그 길의 풍경이 원래 얼마나 평범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신비스런 늪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먼지 낀 마른 웅덩이였다.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하던 소나무들은 철조망 너머로 줄을 맞춰 심겨 있었다.
바다는 관광엽서 사진처럼 짙푸르고 아름다웠다. 모든 것이 경계 안쪽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숨을 참으며 다음 안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짙게 안개가 낀 새벽, 이 도시의 유령들은 무엇을 할까. 숨죽여 기다려왔던 안개 속으로 소리 없이 걸어나와 산책을 할까.
목소리까지 하얗게 표백해주는 저 물의 입자들 틈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모국어로 인사를 나눌까. 말없이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이기만 할까.
◆흰 도시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을 보았다. 도시 동쪽에 지어진 기념관 이층의 영사실에서였다.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 이 도시의 95퍼센트가 파괴되었다고 그 필름의 자막은 말했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이 도시를, 1944년 9월 한 달 동안 극적으로 독일군을 몰아냈고 시민 자치가 이뤄졌던 이 도시를, 히틀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깨끗이, 본보기로서 쓸어버리라고 명령했따.
처음 영상이 시작되었을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보였다. 희끗한 눈이나 얼음 위에 약간씩 그을음이 내려앉아 얼룩덜럭 더럽혀진 것 같았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며 도시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눈에 덮인 것도, 얼음 위에 그을음이 내려앉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부서져 있었다. 돌로 된 잔해들의 흰빛 위로, 검게 불에 탄 흔적이 눈 닿는 데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오래전 성이 있었다는 공원에서 내렸다. 제법 넓은 공원 숲을 가로질러 한참 걸으니 옛 병원 건물이 나왔다.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되었던 병원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한 뒤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종달새와 흡사한 높은 음조로 새들이 우는, 울창한 나무들이 무수히 팔과 팔을 맞댄 소로를 따라 걸어나오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한번에 죽었었다. 이 나무들과 새들, 길들, 거리들, 집들과 전차들, 사람들이 모두.
그러므로 이 도시에는 칩실년 이상 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시가의 성곽들과 화려한 궁전, 시 외곽에 있는 왕들의 호숫가 여름 별장은 모두 가짜다. 사진과 그림과 지도에 의해 의지해 끈질기게 복원한 새것이다.
간혹 어떤 기둥이나 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았을 경우에는, 그 옆과 위로 새 기둥과 새 벽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의를 가지게 된 사람.
한강작가 소설 흰을 읽고....
한강작가는 세상을 어둡고 불행한듯 묘사합니다. 그러나 안네의 일기장을 보면 안네는 그 암울한 곳 에서도 즐거울때도 있었고 희망을 품고 살았다고 합니다. 한강작가의 책 흰에서도 세상은 암울하고 어둡지만 창문틈, 방문 사이로 살짝 들어오는 빛. 작은 희망을 빗대어 흰이라고 한것 아닐까요?
흰 리뷰보기 https://wonysworld.tistory.com/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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