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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었던 문장/책속문장

T. S. 엘리엇 어느 바람 센 밤의 광시

by 워니의서재 2019. 7. 8.

열두 시.

거리 전역이

달의 통합력에 붙들려,

속삭이는 달의 마법이

기억의 마루들과

그것의 투명한 관계들, 그것의

불일치와 일치를 모두 녹인다,

 

내가 지나가는 가로등이 하나같이

숙명의 북처럼 둥둥 울리고,

어둠의 공간 도처에서

광인이 죽은 제라늄을 흔들듯

한밤이 기억을 뒤흔든다.

 

한 시 반,

가로등이 침을 튀겼다,

가로등이 중얼거렸다,

가로등이 말했다, "자기를 보고서

씩 웃는 양 열리는 문의 불빛에 나타난

너에게 갈까 말까 망설이는 저 여자 좀 봐라.

 

옷단이 찢기고

모래로 더럽혀져 있군,

눈초리를 꼭 꼬부라진

핀처럼 꼬는군."

 

기억이 드높이 꾸밈없이

꼬인 일들을 숱하게 토해낸다.

해변의 배배꼬인 한 나뭇가지가

씻기어 반질반질, 함치르르한 모습

 

마치 세상이

뻣뻣하고 하얀

저 뼈대의 비밀을 드러낸 듯하다.

어느 공장 구내의 망가진 용수철 하나,

힘을 잃고 딱딱하게 뒤틀려 금세 부러질 듯한

그 형체에 들러붙는 녹

 

두 시 반,

가로등이 말했다,

"하수도에 납작 엎드려, 슬며시 혀를 내밀고

악취 나는 버터 조각을

게걸스레 먹는 저 고양이 좀 봐라."

 

그렇게 한 아이의 손도, 자동으로

빠져나와 부두 따라 내달리던 장난감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그 아이의 눈에 숨겨진 것은 보지 못했다.

나는 거리에서 불 켜진 덧문들 사이로

 

엿보려는 눈들과,

어느 오후 한 물웅덩이 속의 게 한마리를 보았따.

등딱지에 조개삿갓이 붙어있는 늙은 게였는데,

내가 내민 막대기 끝을 붙들고서 매달렸다.

 

세 시 반,

가로등이 침을 튀겼다,

가로등이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가로등이 콧노래를 불렀다:

"저 달 좀 봐라,

달은 악의를 품지 않는다,

달은 흐릿한 눈을 깜박인다,

달은 구석구석에 미소한다.

달은 풀 머리칼을 매만진다.

달은 제 기억을 잊었다.

 

색 바랜 천연두 자국이 달의 얼굴에 금을 낸다,

달의 손이 종이 장미를 꼬아 접는다,

그 장미가 흙냄새와 오드콜로뉴향을 풍긴다,

달은 제 머릿속을 엇갈려 넘나드는

밤의 온갖 칙칙한 냄새들과 함께

고립무원이다.

 

추억의 원천은

햇살 없이 마른 제라늄과

숱한 틈에 끼어있는 먼지,

거리거리에 밴 밤꽃냄새와,

덧문 내려진 숱한 방안의 여자냄새,

그리고 숱한 복도에 벤 담배냄새와

숱한 술집의 칵테일 향내."

 

가로등이 말했다,

"네 시,

여기 문에 번호가 붙어있다.

기억!

너에게 열쇠가 있다,

작은 등이 퍼져서 계단에 고리를 그린다,

 

올라가라.

침대는 비어 있고, 칫솔은 벽에 걸려 있다,

문 앞에 신발을 벗어두고, 자라, 삶에 대비하라."

단도의 마지막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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